선생님을 울린 아이

2005.07.24 20:17:00

114일의 수업을 끝으로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40일간의 긴 침묵이 내려앉을 교실을 미리부터 정리해 두고 아이들에게 줄 책 선물과 편지까지 미리 써놓은 덕분에 차분했던 방학 날. 1학기 마지막 바이올린 지도 시간까지 챙겨주느라고 본교의 모임까지 뒤로 미루었다. 단 1시간만이라도 더 열심히 배워서 긴 방학 동안 더 배우지 못하는 아쉬움을 담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열심히 배우는 아이들.

각자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주고 노력할 점을 기록한 생활통지표를 처음 받아들고 마냥 신기해하는 1학년 꼬마들의 상기된 모습이 참 귀여웠다. 아이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낱말로 풀어쓰려고 노력했는데 꼬마들이 다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문득, 초등학교 1학년 시절로 돌아가 통지표를 받으면 집으로 달리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수’하나에는 백 원, ‘우’를 받으면 상금이 없으며 ‘미’를 받으면 ‘수’와 맞바꾸던 아버지의 일방적인 약속. 30년도 더 지난 그 때, 1학년 꼬마 시절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리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의 글씨체까지 또렷한 통신표의 한 구절이 각인되어 있다. ‘이 어린이는 아는 것이 있어도 발표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쓴 한 문장.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날까지 손을 들고 발표를 하는 일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인 것처럼 소심한 아이라고 스스로 체념하게 한 문장. 정규 학교 교육이 초등학교로 끝나버린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 나는 늘 말없는 아이였다.

내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내 반 아이들의 통지표에 써주는 문장의 내용에 많은 정성과 주의를 기울이곤 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담임선생님이 문장을 써줄 때는 기도까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고민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고. 자라는 아이들이므로 최대한 장점위주로 써주되, 단점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아이들이 체념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소신을 지켜왔다. 장점을 키우면 단점은 상쇄되리라 믿으며…….

생활통지표를 주고 방학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아이들의 물건들을 챙기게 하는데 가방을 매고 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의 대열에서 ‘은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름 방학을 하면 엄마한테 간다며 좋아하던 아이. 외가에서 동생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착하고 순하디 순한 작은 천사아가씨인 은혜는 별로 말이 없고 자신감도 많지 않아 늘 걱정되는 아이라서 다른 아이들보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필요했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하는 아픔과 외로움이 늘 감지되어 내 가슴을 저리게 하는 그 아이의 슬픔이 담긴 커다란 눈을 보는 일이 내게도 아픔이었던 1학기.

그런데 가방과 준비물을 챙기고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 속에 은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교실을 둘러보니 작은 칠판 뒤에다 뭔가를 쓰고 있었다.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순간적으로 마음이 아려왔다. 말하고 싶었는데 그냥 가는 게 어딘지 서운해서 나 모르게 써놓고 가려고 했나보다. 나는 순간적으로 은혜를 꼬옥 껴안고 말았다.

“선생님도 은혜 사랑해…….” 그 다음 말은 내 눈물 때문에 이어지지 못하고 침묵으로 얼버무리고 있는데, 교실을 나가려던 다른 아이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달려와 안겼다.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것처럼 다섯 아이들과 나는 한 몸이 되었다.

여름 방학이 선언되기가 바쁘게 좋아하며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읍내 아이들과 달리 우리 분교의 아이들은 방학을 반기지 않는다. 생업에 바쁜 어른들 속에서 친구도 없이 방학을 긴 방학을 보내는 일이 싫다고들 한다. 남들은 일부러 돈과 시간을 들여 놀러오는 피아골 계곡에 살면서도 그 계곡보다 학교가 더 좋다는 아이들이 안쓰럽다. 그렇다고 늘 헤어져 살아온 가족들을 놔두고 학교에만 나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대책이 필요하다.

이 나라의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즐겁게 기다릴 수 있기를, 원만한 가정의 틀 속에서 사랑받는 아이들이 되기를, 그런 아이들을 더 깊이 사랑하는 내가 되기를!

이제 겨우 방학을 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아이들의 모습이 보고 싶다. 내 마음은 벌써 말귀도 못 알아듣는 꼬맹이들이 쫑알대던 교실로 달려간다. 사랑한다고 차마 말로 하지 못하고 편지로 써서 책에 붙여준 못난 내 모습은 발표력이 없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내 모습이 분명하다.

아직도 나는 수줍음 많은 우리 은혜에게서 배울 일이다. 사랑의 기술을!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사랑스러운 내 아이들이 보고 싶다. 지금.
장옥순 담양금성초/쉽게 살까, 오래 살까 외 8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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