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아, 선생님도 못하는 게 있단다

2005.08.17 11:14:00

"이 어린이는 아는 것이 있어도 발표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생활통지표에 담임 선생님이 남기신 기록이다. 발표를 잘 하면 더 좋겠다는 취지로 쓰신 글이었겠지만, 내게는 낙인이 되어 버린 문장이다. 그렇다고 발표를 하지 않아서 꾸지람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이제는 내 나이가 그 때 담임 선생님만큼 되었으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그 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지적이다.

나는 지금 내일 있을 두 시간 짜리 강의를 위해서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강의 자료를 정리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이들을 25년 가까이 가르쳐 왔으면서도 아직도 대인공포증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급 정교사 자격 강습을 받는 젊은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연수원에서 실시하는 강의이니만큼 그들의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전망, 교사로서 살아온 진솔한 경험을 선배 입장에서 강의를 부탁받은 때로부터 내 마음은 늘 긴장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면 빨라지는 말투와 놓쳐버리는 핵심에 심장이 두근대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글을 써서 수십 장 나누어 주는 일이 훨씬 쉬울 것만 같다. 이미 제출한 강의 원고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더 많이 해야 될 것만 같은 불안함 때문에 좌불안석이다. 강의할 원고에 덧붙임 자료를 많이 준비해도 막상 앞에 나가면 머리속이 하얘지는 아찔한 경험을 생각하면 두려움조차 엄습한다.

그래서 나는 발표에 자신 없어 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잘 안다. 그래서 채근하거나 닥달하지 않는다. 기다려주기도 하고, 종이에 적어서 발표하도록 지도하곤 했다. 엉뚱한 말을 했을 때 친구들이 웃어버리면 그 아이는 영영 발표하는 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듣는 자세를 가르치곤 했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내 모습을 알기나 할까? 취직 시험을 치를 때에도 면접보는 일이 가장 힘들어서 그런 날은 하루 종일 긴장해서 밥조차 먹지 못하는 못난 내 모습. 어쩌다 교실 수업을 공개하는 일정이 잡히면 몇 날 며칠을 마음 고생하곤 했던 햇병아리 교사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래도 이러한 일은 내가 간절히 원해서 돌아온 기회라고 생각한다. 내가 실천해 온 작은 일들을 가감없이, 진솔하게 전하며 마음으로 다가서서 겸허한 자세로 후배 교사들에게 전하는 삶의 순간을 원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내가 거둔 수확을 나누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방학때면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강의를 계획하기 시작했고 원하는 곳이 있으면 달려가서 봉사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좋아서 하고 있는 독서 교육이나 글 쓰기 교육, 자녀 교육 상담 까지도 설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손을 들고 발표를 못해 본 아이. 발표를 하려면 홍당무가 되어버린 아이. 그 아이는 이제 42년 만에 어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준비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강생들을 위해 좋아하는 글과 참고물들을 복사하여 개인별로 각봉투에 담고 입고 갈 정장을 찾아놓으며 마치 소풍가는 아이처럼 이것저것 챙기는 내 모습이 참 우습다. 겉사람은 늙었어도 아직도 나는 철이 덜든 모양이다. 공개 수업을 할 때보다 더 긴장되는 것은 수강자들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해서 개인적으로 친분이 전혀 없는 젊은 후배 선생님들이기 때문이다.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3배나 더 어렵다고 하는데, 이제 보니 말하는 것이 더 어려운 모양이다. 말하는 수준과 정도가 수강생의 필요에 얼마나 접근하는가, 몰입할 수 있을 만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가, 한 발 더 나아가 고객 감동의 수준에 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생각하니,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자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아 기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나를 온전히 비우며 내가 가진 지식과 지혜가 얼마나 얕고 나약한 것인가를 드러내 놓으며 마음의 기도를 하니 훨씬 편안해진다. 오직 지혜롭기만을 기도했다는 솔로몬의 위대함,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담대한 선택에 주저하지 않았다는 영화의 한 장면을 상기하며 본질에 충실할 것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새벽 4시인데 신문을 배달하는 청년도 있고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차의 소리가 귀를 울린다. 아! 제각기 자기 몫의 일을 열심히 하는 저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내가 살아온 짧지 않은 경험과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 내 몫임을! 아무런 가식도, 꾸밈도 필요없는, 있는 그대로를 전하자. 새벽에 청소를 하는 저 분들처럼, 신문을 말없이 돌리는 저 젊은이처럼만 하자.

아직도 나는 꿈꾼다. 내 단점을 고치는 일이 이렇게 힘들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부딪쳐 보고 싶다.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후배 선생님들이 거치지 않기를 바라는 진심을 담아 나를 포장하지 않고 전달하고 싶을 뿐이다. 그들은 내 제자뻘이거나 자식뻘인 젊은이들이니 더욱 사랑스럽지 아니한가?

아직도 꿈꾸기를 버리지 못한 철이 덜든 내 모습을 보면서 나처럼 발표하기를 두려워하고 자신 없어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더 껴안으며 다독여 주고 싶다.

아이들아, 선생님도 발표하는 게 자신이 없단다. 선생님도 못하는 게 있단다.
장옥순 담양금성초/쉽게 살까, 오래 살까 외 8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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