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중간고사가 끝이 났다. 바뀌는 대입에서는 내신 성적이 강조되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성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시골의 조그마한 학교지만 나름대로는 자신의 내신 성적 관리에 철저를 기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심 교사로서 아이들이 두렵기도 한편으로 부듯하기도 하다.
농·어촌의 조그마한 고등학교에 몇 년 근무하다 보니 자칫 아이들의 교과 지도에 소홀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하게 된다. 특히 아이들의 수준이 여타 도시의 아이들보다 떨어진다는 생각에 교과 연구나 학습 지도면에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까 스스로를 채찍질 해 보기도 한다.
시험조차 동기유발 되지 않는 아이들
중간고사를 치기 며칠 전부터 아이들에게 시험 문제 좀 제대로 보라고 강조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내신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성심을 다해서 시험을 치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공부양도 문제지만 시험에 대한 절박함이라는 것이 애시 당초 없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 시골 학교에 발령을 받고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었다. 50분 시험에 10분도 안 되어 시험을 다 치루고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많았다. 내심 시험 낸 사람의 성의를 무시한다 싶어 아이들을 독려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쉽게 고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시험을 왜 치는지에 대한 동기 유발이 전혀 되지 않은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교사가 아무리 시험의 중요성을 강조해도 막무가내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공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시험이라고 관심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몇 년을 아이들에게 적응해 오면서 나도 모르게 매너리즘에 빠져 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피자 한 판으로 아이들을 유혹할 수 있을까!
부득불 학교로 옮기면서 내신 관리에 가장 핵심이 되는 시험에 아이들이 보다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험을 등한시하는 아이들이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교육 양극화 현상을 부채질 하고 있는 요즈음의 교육풍토에서 공부에 낙오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그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생님, 너무 시험 강조하지 마세요. 학교만 다니면 대학가는 것은 시간문제에요. 공부 잘하는 ○○이에게나 신경 쓰세요.”
“그래도 이놈아, 네가 받은 내신 성적이 혹시 너의 평생을 괴롭힐지도 모를 일인데. 아무렇게나 생각해서는 되겠니?”
“괜찮아요. 학교 내신 성적 보고 뽑는 회사는 안 가면 되죠.”
“네가 세상 물정은 모르는 건지, 애써 무시하려는 건지 선생님은 잘 모르겠구나."
아이와의 대화에서 서로의 입장 차만 확인하고 씁쓸함을 삼켰다. 물론 몇몇 내신에 신경을 쓰는 아이들이야 죽어라 공부에 매달리겠지만 소외된 많은 아이들은 그저 몇몇 아이들을 위한 들러리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들리는 그 아이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가 팽팽하다 보니 자칫 시험이라 것 자체를 너무 쉽게 여겨 학교 공부 자체를 아예 포기해 버릴까 두렵기도 했다.
“이번 시험은 정말로 여러분이 제대로 공부한 번 해서 쳐보도록 하자. 만약 선생님이 낸 시험 문제에 이상한 점이 있다거나 혹은 여타 참고서나 문제집에서 유사한 문제를 찾아내는 사람에게는 피자 한 판을 사겠다. 물론 그 수에는 관계가 없다.”
“선생님, 시험 문제 정말로 어렵게 낼 건가요. 좀 쉽게 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공부하지 않는데, 시험이라도 좀 잘 보게 쉽게 내 주세요.”
“해도 해도 너무한다. 명색이 중요한 시험인데, 공부는 하지 않고 점수는 받겠다는 심보는 좀 그렇지 않니. 그러니 교과서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그리고 시험지도 야무지게 봐라.”
“정말로 문제점 발견하면 피자 사 주나요?”
“너희들은 선생님 거짓말 하는 것 봤나?”
울며 겨자 먹기로 아이들과 내기를 했다. 오죽했으면 이런 내기를 하겠냐 하는 생각에 저절로 부끄럽기까지 했다.
교육 양극화가 부채질한 우리 현장의 모습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 학생들이 시험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그 근원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최근 대학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 대학입학은 쉽게 해 주고 졸업은 어렵게 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으로 무수히 많은 대학들이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정작 그 발상은 우리 아이들을 입시에서 조금 해방시켜 주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발상들이 우리 교육 현장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지는 고민이 없었던 것 같다.
공부를 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확연히 구분되고, 그런 분위기를 우리 모두가 나서서 부채질 하고 있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수월성만을 조장하는 쪽으로 나아가다 보니 일명 그런 우등생들로부터 제외되는 많은 아이들은 그저 그런 아이들의 들러리나 서야 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학교 시험조차도 동기유발이 되지 않는 학교현장을 한 번 상상해 보라. 과연 학교현장만의 문제일까. 우리 아이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하는 곳이 마치 흰색과 검은 색으로 양분되어 날이 갈수록 그 색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이 우리 학교의 현재 모습이다.
정말로 우리 아이들에게 모두에게 피자 한 씩을 돌렸으면 한다. 몇몇 아이들만의 장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시험을 치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정작 교사로서 실수를 저지르고 비판을 받는다손 치더라도 의욕상실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아이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