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 평소 알고 지내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늘 그랬듯이 골프를 치러 가자는 전화였다.
“김 선생, 내일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나랑 골프나 칩시다.”
“아~예. 내일은 좀 그런데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다음이요? 그래서 언제 골프를 배우겠소?”
“죄송합니다.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요.”
사실 이곳에 도착하여 제일 난감한 것은 지인으로부터 골프를 치자는 제안을 받을 때이다.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곳에 온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골프채 한번 잡아보지 않았다.
특히 이곳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 이곳 필리핀 바기오로 간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부러워 한 것은 골프를 마음대로 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곳으로 오기 전에 나 자신과 우리 가족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골프채를 잡지 않는 것이었다. 골프를 배우게 되면 자칫 잘못하면 하고자 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느낀 바이지만 여가 활동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골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저렴한 가격으로 하루 종일 골프를 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골프장에서 이곳 생활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하물며 이곳 바기오 한 골프장에는 골프를 치러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골프 회원권을 소지한 한국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골프를 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은퇴 비자를 받아 이곳에서 몇 년 이상 생활해 온 사람들이며 최근 들어 골프가 대중화가 되어가고 있는 탓인지 휴양 차 놀러 온 부부단위의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마다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 하루하루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골프를 배워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친구나 친척들이 방문했을 때 시간을 보내기에 제일 좋은 것이 골프라는 것이었다.
한번은 골프 배우기를 싫어하는 나에게 골프를 배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주겠다는 지인(知人)의 강요에 못 이겨 마지못해 골프 라운딩(Golf Rounding)을 따라 간적이 있었다. 18홀(Hole)을 도는 내내 지인(智印)은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용어를 캐디(Caddie)와 주고받으며 골프를 즐기는 것이었다.
한 홀(Hole) 한 홀(Hole) 끝날 때마다 골프에 대한 묘미가 더해갔다. 갤러리(Gallery)로 따라 나선 내 마음의 한편에선 골프를 치고 싶다는 욕망이 이글거리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골프를 배우겠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우스웠다. 아마도 지인(知人)은 푸른 잔디 위에서 펼쳐지는 작은 백구의 묘기를 보면 분명 골프를 치고 싶은 충동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지인의 생각이 딱 들어맞은 것이었다.
그 이후로 지인(知人)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골프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였다. 그때마다 다른 핑계를 대며 지인(知人)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일까? 요즘에는 지인의 전화가 뜸하다. 지인 또한 나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 포기한 듯싶다. 그렇다고 나의 속마음을 지인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나’라고 왜 골프를 안 배우고 싶겠소?”
사실 한국에서는 골프를 배운다고 하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한국보다 골프를 배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으며 비용 또한 저렴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골프를 배워 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골프로 인해서 이곳으로 오게 된 나의 목적이 퇴색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