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많은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으로 기억되고 있는 성철 스님 등 고승들을 많이 배출한 해인사를 찾았다. 호국신앙의 요람인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이다.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고 '대적광전(大寂光殿), 3층석탑, 석등'은 창건 당시의 유물이다. 이 절에 머물렀던 희랑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고려 태조를 도와줘 고려의 국찰이 되었다.
주차장에서 해인사로 가는 길은 자연과 벗할 수 있는 산책로다. 길옆으로 대죽이 자라고 계곡에는 깨끗한 물이 졸졸졸 흐른다. 큰 나무들은 가지마다 겨우살이를 매달고 있다. 주차장 주변의 상점에서 겨우살이를 파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은 그림자 못으로도 불리는 영지다. 영지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대가야국 김수로왕의 부인이었던 허황후가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든 일곱 왕자를 그리워하던 안타까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는데 그중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고사목 등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1천 143살이 되던 1945년 고사했다는 것만으로도 해인사의 유구한 역사를 알 수 있다.
봉황문, 흥하문, 해탈문이 연속으로 나타난다. 구광루 마당의 범종루 앞에는 손을 합장한 사람들이 미로처럼 그려진 길을 돌며 소원성취를 빈다. 가야산의 기질을 해인사가 닮고, 해인사의 기질을 스님들이 닮았다던가? 이곳의 산세가 '배가 거친 파도를 가르며 달리는 행주형(行舟形)'이라 해인사 스님들의 염불이 괄괄하고 동(動)적이라며 ‘동편제’라고 하는가보다.
절마당에 들어서면 법당 안에 다섯 불상을 모신 큰 법당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정면에서 맞이한다. 대적광전 앞에는 3층석탑, 석탑 왼쪽에는 궁현당, 오른쪽에는 관음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적광전 좌우로 명부전과 선열당, 그 뒤로 장경각이 있다. 이곳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여러 개의 계단을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장경각은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일반적으로 해인사하면 팔만대장경을 연상한다. 해인사에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국보 제52호인 장경각, 장경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 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2,725판, 보물 제734호 고려각판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팔만대장경은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때(1232년) 몽골의 병란을 맞아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부처님의 힘을 빌려 외적을 물리치겠다는 일념으로 장장 16년에 걸쳐 만들어진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경판은 후박나무로 만들어졌고 세로 24cm 내외, 가로 69.6cm 내외, 두께 2.6∼3.9cm의 크기로 각 행에 14자씩 23행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 태조 7년(1398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것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이곳 해인사로 옮겨와 두개 동의 장경각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
나무로 만들었기에 썩거나 벌레가 슬기 쉽지만 팔만대장경은 오랫동안 제 모습을 지키고 있다. 땅속에 소금 등을 넣어 습도를 조절하고 공기의 흐름으로 온도를 조절할 만큼 과학적으로 설계된 장경각 덕분이다.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지만 장경각과 팔만대장경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불가사의가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부처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비롯해 일주문, 대적광전, 구광루, 석조여래입상 등 문화재가 즐비하고 불교학원인 해인총림(海印叢林)과 백련암, 홍제암, 약수암, 원당암 등의 부속 암자가 있어 해인사를 찾는 관람객들이 줄을 잇는다.
*교통 : 88올림픽고속도로 해인사IC → 1033번 지방도 가야산(해인사)방면 → 약 14Km → 해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