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를 가르치는 여막과 시묘살이

2007.05.09 10:01:00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예전에는 3년 동안의 시묘(侍墓)살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 시대였음에도 시묘살이는 아무나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시묘살이를 마친 자식을 극진히 우대하는 것이 관례였다.

묘소 근처에 여막(廬幕)이라는 움집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하며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리는 일이 시묘살이다. 예전 사람들은 시묘살이를 부모님이 생전에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자식의 도리라고 여겼다. 부모님의 죽음이 자신의 불효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 수염이나 머리도 깎지 않았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어머니의 무덤을 지킨 유범수씨의 시묘살이 이야기가 화제가 됐었다. 그때 우리는 살아계신 어머니를 모시듯 매일 세 끼씩 상식을 올리고 책을 읽어드리는 유범수씨에게서 효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문의문화재단지 한편에도 여막이 있다. 대청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곳의 묘소와 여막은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 한양 조씨 문중의 조육형씨와 부친 조병천(2000년 4월 작고)옹이 대를 이어 시묘해 주변으로부터 칭송받은 것을 기리기 위하여 2003년 5월 8일 문화재단지에 재현한 것이다.

안내판의 내용에 의하면 조병천옹은 1957년 부친이 사망하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3년 동안 생식을 하며 시묘생활을 했고, 선친묘소에 공장이 들어서자 이장한 뒤 다시 여막에서 3년 동안 시묘생활을 했다.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문의문화재단지에 있는 여막에서 조육형씨가 상식을 올리며 시묘살이를 재현했다. 조육형씨의 모교인 강내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이곳으로 현장학습을 나와 효의 중요성을 배웠고 충북방송에서도 취재를 나왔다.








여막의 안내판에 있는 대로 우리의 옛 조상들은 효를 백행지본(百行之本)으로 여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힘을 다하였다. 효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게 사라져가는 인륜(人倫)과 천륜(天倫)을 살리는 지름길이다.


조육형씨의 호는 ‘은혜를 받들면서 살겠다’는 은봉(恩奉)이고, 부친인 조병천옹의 좌우명은 정심(正心)이었다. 세상살이 복잡하지만 바른 마음이면 다 된다. 옛 어른들의 가르침을 따르며 바른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시묘살이나 여막의 정당성 여부를 너무 따지지 말자. 효를 가르치는 참교육장으로서의 역할만 생각하자. 어버이날에만 스파크를 일으키는 1회성 효는 의미도 없고 부모가 바라지도 않는다.

이번 어버이날은 여막에서 효가 무엇인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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