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떠나는 여행길이다. 간밤에 늦게까지 한 약주 탓인지 몸이 무겁다. 가뭄 끝에 내린 단비 때문인지 산빛이 더욱 푸르른 모습을 하고 있다.
전주에서 3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고흥의 팔영산(八影山). 오는 도중 간간히 비가 뿌려 염려를 했는데 다행이 도착할 무렵엔 산봉우리에 흰 구름만 걸려 있을 뿐 날이 맑다. 산에 오르기엔 그만이다.
한때 호남 4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던 능가사를 곁에 두고 구름 속에서 웅장한 자태를 보일 듯 말 듯 드러내고 서있는 팔영산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습한 기운 때문인지 이내 땀이 송골송골 베어온다. 거기에 한 무리의 모기들이 윙윙거리며 따라온다. 손을 휘적거려도 질기게 따라 붙는다. 이놈들은 팔영산 1봉을 오르는 길목인 흔들바위에 오를 때까지 따라붙는다. '징한' 놈들이다.
팔영산은 8개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산의 이름도 팔영산(八影山), 팔령산(八靈山), 팔점산(八点山) 등 다양하다. 그리고 8개 봉우리마다 이름에 따른 시가 적혀 있는 것도 팔영산만의 독특한 운치다. 산에 오른 자들은 정상에 서서 시원하게 펼쳐진 고흥의 바다를 바라보며 시 한 편 읊조리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우뚝한 바위덩어리로 되어 있는 제 1봉인 유영봉에 올랐다. 헉헉거리며 달려와 메스껍고 답답했던 속이 이내 시원한 바람에 확 쓸려간 기분이다. 온 사방이 흰 구름 속에 잠겨 있다. 간혹 선선한 바람이 구름을 저만치 밀어낸다. 그러자 저 멀리 산 아래로 마을이 보이고 점점의 작은 섬들이 바다에서 놀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이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그러나 이내 구름은 바다를 감춰버린다. 그러고 보니 바람은 심술궂은 개구쟁이 같다.
유영봉을 떠나 성주봉, 생황봉, 사자봉을 지나 5명의 신선이 노닐고 갔다는 오로봉에 올랐다. 봉우린 모두 바위로 되어 있다. 봉우리를 오르기 위해선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 나처럼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아찔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의 매력을 듬뿍 느낄 수 있다.
팔영산의 봉우리와 주변의 풍경과 기암괴석의 비경은 보면 볼수록 아름다웠다. 특히 우리가 산에 오른 날(23일)은 흰 구름에 덮여 있어 그런지 그 아름다움이 더했다. 봉우리 하나하나 오르면서 저마다 감탄사를 연발한다.
"금강이 따로 없어. 여기가 금강이야 금강."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가경이라더니 여기가 그러네. 1봉보단 2봉이, 2봉보단 3봉이 갈수록 더 기막히는데 안 갈 수가 없어."
이때 백 선생이 한 마디 한다.
"하~따 좋은 거. 여기에 탁배기 한 사발만 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데 말여. 신선놀음 한 번 실컷 하고 가는 건데…."
정말 그렇다. 사람이 있고, 시가 있고, 구름이 너울너울 무희처럼 춤을 추고, 줄곧 우리를 따라 오며 노래하는 산새의 지저귐이 있다. 여기에 탁배기 하나만 있으면 신선이 부럽지 않을 성 싶다.
오로봉에서 여섯 번째 봉우리인 두류봉까진 가파른 절벽이 위험스럽게 펼쳐진다. 쇠줄을 타고 절벽을 오르고 쇠줄을 타고 절벽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그 절벽을 타고 바라보는 산경의 모습은 선경(仙境)에 든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아마 흘러가는 구름 때문이리라. 망망운해 속에서 바라보는 산 경치는 하얀 종이에 초록의 물감을 살짝 뿌려놓은 것 같다.
두류봉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자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두류봉을 노래하고 있는 시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운해와 드문드문 구름 속에서 자태를 드러내는 멋들어진 바위와 추록의 숲들, 그리고 여전히 구름 속에서 노래하는 새들의 지저귐이다.
팔영산의 특이함은 맑고 청아한 새들의 노래가 산 아래이건 정상이건 계속해서 들려온다는 것이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작은 노래가 맑은 시냇물처럼 졸졸졸 흐르는 새들의 소리는 산행의 즐거움을 한층 더해준다.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구름 속에 앉아 시를 읊조려 보았다.
건곤이 맞닿는 곳 하늘문이 열렸으니
하늘길 어미메뇨 통천문이 여기로다
두류봉 오르면 천국으로 통하노라
정말 이곳 두류봉에 오르면 천국으로 통할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온갖 세상의 번민에 가득 찬 사람도 이곳에 5분 정도만 앉아 새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세상사 고민들이 이내 사라질 것 같다.
두류봉에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칠성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가 올지 모른다는 소리에 일행의 발걸음도 조금씩 빨라졌다. 그래도 절벽을 오를 땐 조심스러웠다. 비경을 구경하려다가 천당길로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칠성당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오르는 마지막 봉우리 적취봉. 무얼 쌓아놓고 취했기에 적취봉이라 했을까. 들어보니 초록의 꽃나무와 그림자를 쌓아 만든 산봉우리란다. 하하, 세상은 온갖 재물과 욕심을 쌓으려고 하는데 이 봉우리는 초록의 그림자를 쌓아 병풍을 만들었구나.
적취봉에 앉아 있으려니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그래서 저 멀리 속세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이곳에서 살겠으니 혼자 살면 어떻겠냐고. 그러자 아내가 웃는다.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신선이 되는 듯하고
새소리 정다운 벗 삼아 걸으니
무릉도원이 예 아닌가 싶어
속세의 아내에게 전화를 하여
나 이곳에서 살 테니 당신 혼자 사소 하니
그렇게 좋아 하며 웃네
시인이 별건가. 마음에 감흥이 와 시를 쓰면 시인이지. 이 멋진 모습을 보고 평범한 시심하나 건져 올렸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렇게 시인 아닌 시인이 되어 상념에 젖어있는데 유 선생이 사과를 꺼내더니 나누어 준다. 꿀맛이 따로 없다. 구름과 바람과 새를 벗하며 먹는 한 입의 사과에 즐거움이 묻어난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행복이란 게 작은 것인데 우리는 너무 큰 것에서만 찾는 건 아닌지 싶은 생각도 든다.
적취봉에서 내려와 외톨이로 서있는 깃대봉에 잠시 들러 산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 양 옆으로 여우꼬리가 흰 꼬리를 빳빳이 들고 피어있다. 새들은 여전히 우리를 따라오며 노래를 부른다.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