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아야 하는 그래도라는 섬

2007.06.30 09:52:00


책을 읽다 보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게 있고, 더디게 들어오는 게 있다. 그건 아마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찌됐든 눈에 들어오는 책은 아무리 딱딱한 글이라도 금새 읽어나가고, 더디게 다가오는 글은 쉬엄쉬엄 읽게 된다. 어떤 때엔 한쪽에 놓아두었다가 눈에 띄면 읽는다. 내겐 김승희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가 그렇다.

쉬는 시간 틈틈이 책을 읽다가 덮어두고 있는데 친한 동료 여직원이 읽을 만한 책을 찾는다. 그래서 무심코 준 책이 김승희의 책이다. 그런데 그 동료는 금세 읽고는 좋다며 가져다준다.

“벌써 읽었어요. 괜찮아요?”
“아주 공감이 가고 좋았어요.”
“그래, 난 영 더디고 안 나가던데.”
“난 여자잖아. 그래서 이 책이 쉽게 공감이 가고 잼있게 읽은 것일 거예요.”

여자니까 쉽게 읽고 남자니까 더디게 읽는다. 정말 그런지도 몰랐다. 남자이기 때문에 그녀의 글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녀의 글은 지극히 여성적, 여기서 여성적은 부럽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의 시각에서 개인으로서의 여성과 사회구조면서의 여성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대부분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이나,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김승희의 글이 무슨 철학적 담론을 가지고 이야기한 글은 아니다. 개인적인 일상사를 여성의 시각에서, 어머니의 시각에서, 아내의 시각에서 그리고 딸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글 사이사이에 징검다리마냥 시 한 편씩을 올려놓았다. 그럼 표지 제목이기도 하고 그녀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시편을 잠시 보자.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중략)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더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과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하략)”

그녀는 말한다. 여자의 삶은 119와 같다고. 여자의 삶이란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이런저런 숨 가쁜 요청에 따라 불을 끄러 불려 다니는 119와 같다고 한다. 그 119를 그녀는 남편의 병으로 더욱 실감하게 됐고, 남편의 병 수발은 자신이 빨간 불자동차가 되었음을 느꼈고, 그래서 더욱 인생을 전심전력으로 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삶은 진행된다며.

사실 우리 삶이란 게 고달픔의 연속이 아닌가.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그래서 늘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그러면서도 웃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웃는 게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건 남자나 여자나 매 한 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전심전력으로 삶을 평범하게 살다가도 그 삶이 지치고 우울해지고 자포자기가 될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행위를 벌이기도 한다. 그녀는 그걸 두부와 관련해 말한다.

“우리 모두는 보통 두부처럼 연약하고 평범하고 말랑말랑하며 유순하다.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평범한 여인의 평범한 손가락에도 가끔 그런 무서운 일이 발생한다. 평범은 이미 절망한 자의 위장이거나 때로 심한 자포자기의 우울이기도 하다.”

두부를 자르고 있다가 우연히 한 여인이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는 소리를 지르는 텔레비전 속의 모습을 보며 평범한 주부의 우울한 그리고 무서운 자포자기의 일상을 떠올린다.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는 두 개의 모습. 말랑말랑한 모습 속에 감춰진 비수의 딱딱함. 이로 인해 잘 나가던 여배우가 자살을 하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던 부부가 이혼을 하고 그런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래도 목숨 끊지 말고, 사랑의 불 꺼트리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왜? ‘그래도’라는 섬이 있기 때문에. 뗏목을 타고 갈지라도 함께 손잡고 사랑 나누며 호흡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김 현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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