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을 사랑한 죄 밖에 없는데...

2007.08.24 08:39:00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다. 아무리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도 내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라면 흥미를 끈다. 당사자에겐 크나큰 고통일지라도 사랑 이야긴 그 자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제격이다. 그런데 그놈의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왕의 자리까지 포기했을 정도라면 사랑도 아마 보통 사랑은 아닐 것이다.

허면 지금처럼 남녀의 만남이 자유롭지 못한 조선시대의 사랑방식은 어땠을까.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여 어릴 때부터 남녀 간의 내외함을 극히 경계했던 조선. 그때에도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한 사랑(또는 연애)은 이루어졌다. 이수광의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 사건>을 들여다보면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울기도 하며, 잘못된 인습에 맞서기도 한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흥미롭게 펼쳐진다.

남성들을 치마폭에 쥐고 놀던 여인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감동이나 어을우동 같은 여인들은 일부종사를 거부하고 뭍 남성들을 자신의 치마폭에 감싸고 놀았다. 특히 세종 때의 유감동은 현감의 아내이면서도 스스로 창기라 하면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남성들을 가지고 놀았다. 그녀는 한양과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남성들과 통간을 했다. 이것이 세종의 귀에 들어가 유감동은 노비가 되어 유배를 당하고 유감동과 간음했던 사대부들은 곤장과 태형을 맞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어을우동. 어우동이라 알고 있는 이 여인은 어쩌면 조선시대 여인 카사노바라 할 수 있다. 명문 사대부가의 여인이었던 어우동은 남의 아내가 되어있으면서도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했다. 집에서 일하는 은장이를 유혹하여 정을 통한 뒤 소박맞은 어우동은 본격적인 남자 사냥에 나선다. 그녀의 남자 사랑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의에 의해서다. 그래서 스스로 남자를 찾아나서 자신이 맘에 드는 남성이 있으면 치마폭에 휘감고 숱한 남성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놀았다.

그녀의 사랑법은 조선의 예법이나 규범을 무시하듯 자유로웠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겉으로 근엄한 척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을 성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그런 면에서 어우동은 요부라기보다는 어쩌면 당시 조선의 잘못된 인습과 제도에 저항한 여인인지도 모른다. 억눌리고 닫힌 성에서 스스로 벗어남으로써 정체성을 찾고 인습에 항거한 여인인지도 모른다. 결국 그로 인해 그녀는 교수형을 당했지만 말이다.

사랑 때문에 왕세자 자리 버린 양녕대군

우리는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 총명한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일부러 광인 흉내를 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왕이란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만백성 위에 군림하는 최고권력자 자리가 아닌가. 그런 왕위를 총명하다고 해서 동생에게 쉽게 물려줄 리가 없다. 양녕 또한 그리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저자는 사랑하는 여자로 인해 아버지인 태종과 갈등한 것이 한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태자 양녕은 당시 태종과 함께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도 많았다. 그런 양녕에게 한 여자가 눈에 띈다. 어리라는 여인이다. 다른 남자의 첩이었던 어리에게 한 눈에 빠진 양녕은 강제로 그녀를 궁으로 데려간다. 양녕과 어리의 사랑은 밤낮을 모를 정도로 뜨겁게 타오른다. 그러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어리는 궁에서 추방된다.

이에 양녕은 태종에게 거세게 반발한다. 그리고 양녕은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다. 아니 어쩌면 왕위 대신 사랑하는 여자를 선택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걸 한 편의 소설로 만들면 세기의 로맨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의 윈저 공이 심프슨 부인을 사랑하기에 왕위를 포기했던 사건처럼 말이다.

천민을 사랑한 죄로 죽음 선택한 여인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것도 죄란 말입니까?"
가이는 청송 관아에 끌려가자 울면서 항변했다.
"닥쳐라! 양녀가 천민과 혼인을 하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가 사람을 죽였습니까? 도둑질을 했습니까? 남에게 전혀 해를 입히지 않았는데 어찌 죄라고 하십니까?"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신분 차이도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건 그랬으면 좋겠다는 의미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얘기는 아닌가 보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보면 말이다. 과거만 그럴까. 지금 이 순간에도 부자와 빈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차이로 인해 사랑이 깨지는 경우는 허다하다.

헌데 옛날엔 빈부 차이보단 신분 차이로 인해 사랑이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나 보다. 세종 때의 가이라는 여인과 부금이라는 남자의 사랑을 보면 말이다.

가이는 양녀이고 부금은 가이 집에서 일하는 사노다. 어릴 때 부모를 잃은 가이는 부금에게 모든 걸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신분의 벽을 뚫고 결혼한 두 사람의 사랑은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한다. '우리 사랑만 진실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하는 순진한 가이의 말은 이내 무색해지고 관아에 고발된 것이다.

관아에 끌려간 가이는 무슨 죄가 있냐며 항변하지만 먹혀들지 않는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부금은 참수형을 당하고, 가이는 교수형을 당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죽어서 한 곳에 묻힌다. 죽음도 두 사람의 사랑을 떼어놓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가이와 부금은 남성 중심의 잘못된 제도의 피해자들일 것이다. 남성은 천민과 혼인을 하거나 첩을 둬도 괜찮았지만 양반인 여성은 천민과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법으로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사랑이 어찌 제도로 막을 수 있겠는가. 사랑은 흐르는 물과 같기도 하고 바람 같기도 해서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산인 것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뜨거운 남녀상열지사는 있게 마련이다. 그 남녀상열지사엔 은밀한 사랑도 있지만 지고지순한 사랑도 있다.

혼인 첫날부터 사랑의 시를 주고받은 심의당 김씨의 사랑은 현대인에게도 애잔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이 뭔지를 일깨워 준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미치도록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심노승. 아내에 대한 사랑을 겉으로 표출한다며 다른 양반들의 시기와 멸시를 받지만 그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못한다.

심의당 김씨 부부와 심노승의 사랑법은 현대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쉽게 만나고 가볍게 헤어지는 남녀 간의 만남 속에서 한 남자만을, 한 여자만을 깊게 사랑한 두 사람은 이 책의 다른 남녀상열지사에 비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김 현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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