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도막이 될 고향, 들녘은 그대로다

2007.09.29 08:40:00

내 고향은 충북 청주시 흥덕구 내곡동이다. 안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안골, 소래울로 불렸는데 그중 내가 태어난 2구는 작은 소래울이다. 청원군에서 청주시로 편입된 지 24년이나 되었지만 고향마을은 지금까지 전형적인 시골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고향을 생각할 때면 청주시보다 청원군이 먼저 떠오르고 내곡동보다 내곡리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물론 시내치고는 다른 지역에 비해 터무니없이 땅값이 싸기도 했다. 그린벨트, 절대농지 등에 묶여 개발이 되지 않는 것에 불만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도시 근교의 마을로서 그동안 개발과 거리가 멀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났고, 고향에 땅 한 평 없는 사람이지만 나도 개발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쌍수를 들어 반대했다. 남들 부자 되는 것 배가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고향에서 나의 어린시절을 발견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내 고향 마을도 더 이상 개발의 손길을 피해갈 수 없다. 청주시민들이 궐기대회까지 열며 유치한 하이닉스 제2공장이 고향 마을 앞에 들어선다. 공장부지가 될 내곡동 1구와 달리 내가 태어나고 자란 2구가 개발지역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고향을 잃는 게 현실이 되고 보면 막막할 수밖에 없다. 즐거워야 할 명절이었지만 고향 사람들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곧 닥쳐올 일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얘기했다. 고향의 반, 어쩌면 어린 시절의 반도막을 잃어야 하는 나도 서글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살다보면 되돌릴 수 없는 일도 많다. 보전과 개발, 고향과 실향이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더구나 마을 앞으로 충북선 철길이 지나고 중부고속도로가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도 건설현장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만큼 착한 사람들이다. "정부의 정책을 누가 막을 것이냐"는 말에서 이미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저 보상가 등을 적정하게 책정해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나에게도 이번 추석은 남달랐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난 후 처음 맞이하는 명절이라 뭔가 중요한 것 하나를 빼놓은 듯 마음이 허전했다. 내가 모시고 있던 탓에 추석날 어머님과 같이 고향에 오지 못한 죄책감을 달래려고 아내와 함께 들녘으로 나갔다.


들로 나가는 길가의 밭에 토란이 심어져 있다. 토란의 큰 잎을 보며 비 오는 날 우산대용으로 사용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텃논에는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이 고개를 숙인 채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벼가 익기 전에 이삭을 빨아먹어 농민들을 울상 짓게 하는 참새들이 전선줄마다 떼를 이룬 채 앉아 있다.


고향 마을과 들을 연결하는 원고개에 다다랐다. 새마을 사업 등으로 많이 낮아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고개다. 들녘 쪽으로는 예비군 방공호도 몇 개 있고 어린 시절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상여집도 그대로 있다.

지금은 들녘까지 자장면을 배달하는 세상이지만 예전에는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여자들이 밥 이고 오는 것을 기다리느라 자주 눈길을 주던 곳이다. 어쩌면 야트막한 이 야산이 작은 소래울이 이번 개발에서 비켜날 수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내 고향의 들녘은 청주에서 가장 큰 까치내들이면서 충북 최대의 곡창지대인 미호평야의 한줄기이다. 짧게나마 지평선이 펼쳐지고 들판이 넓다보니 논농사를 많이 짓는다. 청주시내를 감싸고 있는 우암산과 사적 제212호인 청주 상당산성도 한눈에 바라보인다.


이곳 들녘도 산업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까치내들이 양쪽으로 나뉘었다. 까치내 건너편 오창들에는 오창과학산업단지가 들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눈앞에 보이는 신축 건물들이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사는 모습이 참 다양화된 세상이다. 추석날 오후라 중부고속도로 위의 차량들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하늘에서 들녘을 내려다보며 패러글라이딩을 즐기고 있다. 조상 잘 모시고 가족들과 화목을 다지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궂은 가을 날씨 때문에 농민들의 마음이 우울한 것을 잠자리들은 모르는가보다. 고추잠자리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잠자리들이 논두렁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다.

저희들만의 잔치에 나타난 훼방꾼을 경계하느라 분주히 하늘을 오간다.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잠자리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래도 잠자리들 때문에 들녘이 편안해 보인다.


고향은 마음을 포근하게 해준다. 고향에 들어서면 누구나 마음을 열고 동심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는 조금 더 있어도 그만이고 조금 못나도 흠이 아니다.

일찍 차례를 지낸 고향 친구 몇이 도랑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누군가 예전에 먹던 토종 미꾸라지의 맛을 얘기했을 테고, 죽이 잘 맞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친구들을 들녘으로 불러냈을 것이다. 고향은 환자들만 상대하던 의사마저 흙탕물에 빠져 개구쟁이가 되게 만들었다. 이날 잡아온 미꾸라지 몇 마리와 향어 매운탕을 안주로 친구들과 오랫동안 회포를 풀었다.


추석날 아침까지 날이 궂었는데도 저녁에는 둥근달이 두둥실 고향 하늘 위로 떠올랐다. 어느 하늘이라고 다를까만 고향에서 보는 보름달이 유난히 크고 밝았다.

이 세상에 없는 어머님 때문일까? 추석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정월 대보름날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달맞이 가는 어머니를 따라 뒷동산을 올랐고, 두 손을 합장한 채 정성껏 소원을 빌던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봤었다.

불현듯 어머님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는 반 도막의 명절을 맞이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괜히 뒷동산에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하는 추석이었다. 없어질 반 도막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고향을 자주 찾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고향과 명절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추석이었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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