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창포에서 웅천을 거치는 606번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면 40번 국도와 이어지고, 그곳에서 보령방향으로 얼마 안 가면 2002년에 문을 연 개화예술공원이 오른편에 있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조각품들 때문에 쉽게 눈에 띄는데 보령의 오석이 조각 재료로는 세계 최고라는 것을 널리 알리려고 만든 공원이다.
공원 내에는 거문예석, 모산조형미술관, 허브랜드와 야생화, 화인음악당 등이 있다. 각종 조각품과 함께 50여점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서 '국제조각심포지엄'도 열린다.
왜 그런지 한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런 곳이 옛 절터였던 사지(寺址)다. 그래서 분위기를 느끼려면 낙엽이 뒹구는 가을이나 휜 눈이 내리는 겨울, 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 사지를 찾는 게 좋다.
우리나라는 서울 종로의 원각사지, 충남 서산의 보원사지, 경북 경주의 감은사지 등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사지들이 많다. 나라의 흥망성쇠나 정책에 의해 사찰의 운명이 결정되던 시절이 있었기에 사지에는 석탑, 당간지주, 석조 등 문화재도 많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는 성주사지(聖住寺址)가 그렇다. 성주산 남쪽 기슭의 성주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지어져 오합사로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 때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개화예술공원에서 성주사지까지는 비교적 이정표가 잘되어있다. 성주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사찰과 달리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가는 길이 구불구불 산길이어서 산 중턱이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완전히 빗나갈 만큼 마을을 막 지나는 도로변 평지에서 갑자기 나타난다.
사지는 남에서부터 중문처ㆍ석등ㆍ5층 석탑ㆍ금당터가 있고, 동서로 동삼층석탑ㆍ중앙 3층 석탑ㆍ서 3층 석탑이 나란히 서 있으며,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북서쪽에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비문에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당나라로 유학까지 갔던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이다. 89세로 입적하자 진성여왕이 ‘낭혜’라는 시호와 ‘백월보광’이라는 탑 이름을 내렸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로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이다.
오층석탑(보물 제19호)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금당터 앞에 서 있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우아한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한다.
동삼층석탑(시도유형문화재 제26호)은 금당터 뒤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 가장 동쪽에 있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1층 몸돌의 남ㆍ북면에는 자물쇠모양과 한 쌍의 고리모양을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중앙삼층석탑(보물 제20호)은 금당터 뒤편에 나란히 서 있는 3개의 석탑 중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탑신부 1층 몸돌 한쪽의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가는 등 많이 손상되었다.
서삼층석탑(보물 제47호)은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다. 1971년 해체ㆍ수리를 할 때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있었다고 한다.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든다.
석불입상(충남문화재자료 제373호)은 강당지 귀퉁이에 위치하고 얼굴은 타원형인데 마모로 알아보기 어렵다. 왼쪽의 귀는 없고, 코는 '긁어 달여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 때문에 훼손된 것을 시멘트로 때움질했다.
▲ 석등과 석계단
석등(충남유형문화재 제33호)은 오층석탑 앞에 있는데 높이는 2.2m다. 팔각형을 기본 형태로 만들어졌고 불을 켜는 부분에 4개의 문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계단(충남문화재자료 제140호)은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목에 방울이 달린 사자의 석상이 양쪽에 있었으나 1986년 도난당해 현재는 계단만 남아 있다.
입구에 상주하고 있는 문화유산해설사에게 부탁하면 성주사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