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르지요.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사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생도청에서의 첫 만남에서 이루어진 홍도와 윤복의 대화이다. 윤복의 답에 홍도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건 자신의 내면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을 윤복이 다시금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능가할 한 천재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그림의 두 천재인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그 운명의 끈은 스승과 제자의 모습으로,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애절함으로, 때론 서로에 대한 경원의 모습으로 엮어진다.
두 명의 천재, 단원과 혜원 그리고 또 한 명의 천재 정조
사랑을 모르는 자가 사랑을 그릴 수는 없다. 아픔과 슬픔을 모르는 자가 아픔과 슬픔을 그릴 수가 없다. 또 쓸 수도 없다. 비록 그리고 썼다 할지라도 그건 영혼이 없는 화려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을 읽는 내내 줄곧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말하는 세 사람(홍도, 윤복, 정조)의 마음에 절절히 동감했기 때문이리라.
정조는 그림을 통해서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얼굴을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초상을 그리다 피살당한 화원들의 죽음의 원인을 알고 싶어 한다.
“사람은 죽고 산천은 변하나 그림은 천 년을 간다. 그림을 아는 그대라면 화원들의 죽음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정조의 명을 받은 두 사람은 은밀히 내사를 한다. 추리소설을 방불케 한다. 다만 일반 추리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두 사람이 그림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묘미는 다른 곳에 있다.
윤복을 향한 홍도의 애절한 사랑의 마음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러나 그건 마음일 뿐 손을 내밀어 잡을 수 없는 사랑이다. 윤복은 윤복 나름대로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사랑의 감정과 위선에 가득 찬 당시의 사대부들에 대한 비판의 송곳들을 그림 속에 집어넣는다. 그것을 단원과 정조는 집어낸다. 그림으로 세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시대를 풍미한 천재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
두 사람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상이하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음을 볼 수 있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이른바 동제각화다.
신윤복과 김홍도는 동시대에 활동한 화가이지만 화풍은 전혀 다르다. 단원이 서민들을 건강한 삶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면, 혜원은 양반들의 위선적인 면을 주로 그렸다. 또 단원이 주로 남자들을 그린 반면, 혜원은 여자들을 그렸다. 그리고 단원의 김홍도의 그림이 단순히 갈색 바탕의 배색에 힘 있는 먹선 위주로 그렸다면 혜원 신윤복은 세련되고 섬세한 필치로 화려한 채색화를 그렸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채색화는 도화서 양식엔 어긋난 것이었다.
헌데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의 그림 중엔 제목, 배경, 인물의 숫자나 위치, 동작까지 비슷한 그림들이 있다는 것이다. 김홍도의 '빨래터'와 신윤복의 '계변가화', 김홍도의 '우물가'와 신윤복의 '정변야화' 또 단원의 ‘씨름과’과 혜원의 ‘쌍검대무’ 같은 그림들이다. 우리가 단원이나 혜원의 그림들을 접하면서도 종종 접하면서도 전혀 생각지 못한 것들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것을 기막히게 잡아내 놀라울 만치 엄청난 상상력으로 독자의 호기심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주고 있다.
이뿐 아니다. 소설은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을 두 사람의 그림을 통해 상세하게 묘파하고 있다. 여기에 궁중 도화서의 생도청, 육조거리 대장간, 우물가의 여인들의 모습과 당시 그림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의 일상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허면 왜 작가 이정명은 이런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그것도 김홍도의 마음과 입장에서 쓰게 되었을까? 그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천재 화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 얼굴에 관한 아주 길고도 비밀스런 이야기를. 가르치려고 했으나 가르치지 못한 얼굴, 뛰어넘으려 했으나 결국 뛰어넘지 못했던 얼굴, 쓰다듬고 싶었으나 쓰다듬지 못한 얼굴, 잊으려 했으나 잊지 못한 얼굴……. 나는 그를 사랑했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원과 동시대에 살았으면서도 역사 속에서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신윤복. 도화서 화원으로 속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에서 쫒겨났다는 한 화가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이 작가로 하여금 그를 완벽하게 재현시키도록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조의 말처럼 사람은 죽고 산천은 변하나 그림은 천 년을 간다. 두 사람은 가고 산천은 변했으나 두 천재화가의 그림은 지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대해, 그들의 그림에 대해 많이 모른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고흐와 고갱, 피카소는 아는데 김홍도와 신윤복은 모른다. 아니 아는 것 같은데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한 천재화가의 모습을.
작가는 두 사람의 그림을 통해 그들의 만남과 이별을 가슴 떨리게 그려냈다. 그리고 예인으로서 숙명적인 대결과 그 대결 속에 숨겨진 사랑의 모습을 빠른 속도와 아름다운 문장으로 창조해냈다. 해서 책을 집어든 독자는 읽는 순간부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영원한 예인으로 기억될 두 천재 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 두 사람의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한 편의 글이고, 그들의 뜨거운 혼이 담긴 그릇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