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용순검이 있으니
번쩍이는 칼날 길이가 삼 척이로세.
황금으로 갈고리를 만들고
녹련(綠蓮)으로 칼끝을 만들었네.
문득 괴이한 빛을 내뿜더니
두우(斗牛)를 서로 다투며 쳐다보도다.
바다에서는 기다란 고래를 베고
뭍에서는 큰 이리를 잡을 수 있네.
북녘으로 픙진의 빛을 돌아보니
연산(燕山)은 아득히 멀기만 한데
장사가 한 번 탄식을 하니
수놓은 칼집에 가을 서리가 어리누나.
정조가 세손일 때 지었다던 '보검행'이라는 시다. 보검을 치켜들어 자신을 괴롭히던 세력들인 고래와 이리를 베고 새로운 조선이라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겠다는 이산의 포부가 잘 드러나 있다.
실제로 이산은 24살에 조선의 22대 왕에 오른 다음 세손 시절에 꿈꿨던 이상을 현실로 보여준다.
그 첫 행사가 을묘원행이다. 왕 위에 오른 지 19년만이다. 을묘원행은 조선시대 최대의 행차로 1795년 윤 2월 9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사도세자의 묘인 현릉원 참배와 화성행궁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고 16일 창덕궁으로 돌아오기까지 8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된 행사이다.
그렇다면 왜 정조는 이런 행사를 감행했을까. 효심이 지극하기도 소문난 정조지만 단순히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축하하기 위해서만 그랬을까. 아니다.
여기엔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노림수가 있었다. 임금의 자리에 올라 많은 개혁을 통해 조선의 체계를 바꾸는 성과를 올렸지만 그의 적들인 노론벽파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세손 시절부터 수없이 그의 목숨을 노리던 노론은 임금이 된 후에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정조는 자신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노론벽파 세력을 견제하려 한 것이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출중한 임금이면서 비극적인 임금을 들라면 정조를 들 것이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을 끔찍이 아끼던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고, 왕에 오르기까지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정조. 임금이 되어서도 자객이 들고 한시도 맘을 놓지 못한 채 신하이면서 적들인 노론벽파 세력과 싸워야 했던 정조. 그가 왕 위에 오른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이 되자마자 이렇게 외친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죄인이 아닌 죄인 사도세자. 그로 인해 죄인의 아들이 되어야 했던 정조 이산. 그런 정조를 죄인의 올가미에 묶어놓고 숨통을 죄려 했던 노론벽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세력들에게 정조가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외친 것은 그들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외치곤 이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한다.
“아버지,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이제 억울하게 돌아가신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정조는 그를 몰아내고 죽이려 했던 홍인한, 홍계희 등 홍씨 일가와 정후겸 등 일파에게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렇다고 노론벽파의 힘이 약해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더욱 교묘하게 정조에 대항해왔다. 몇 번의 역모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대적은 나라를 위해서도 백성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순전히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득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선 못할 짓이 없었던 것이다.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라
백성들이 원하는 군주란 어떤 사람일까? 훌륭한 지도자란 어떤 사람일까? 과거와 현대라는 시대를 뛰어넘어 간지럽고 배고픈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지금 우리도 그 지도자를 뽑기 위한 상황에 있다.
그런데 지금 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나온 그 사람들은 개혁이란 이름의 정책들을 내놓고 들먹이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엔 백성 아니 국민의 목소리는 없다. 아니 있더라도 있는 자들을 위한 것들은 있어도 이 땅에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목소린 온데간데없다.
허면 정조는 어땠을까? 그는 왕 위에 오른 뒤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때론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정책을 집행할 때 자신의 실적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잘 살게 하는 데 맞춰졌다. 그래서 때론 위험을 무릅쓰고 기득권자들과 싸웠다. 부정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자들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는 수많은 개혁을 펼쳤지만 백성들로부터 저항은 없었다. 왜? 그의 개혁이 가난하고 소외당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의 힘든 노력의 결과들은 정조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정조가 죽자 정조와 대립각을 세웠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어린 순조가 친정을 펼치기 전까지 전권을 휘둘렀던 정순왕후는 노론벽파인 김관주, 심환지, 서용보 같은 인물을 전면에 배치하여 정조가 25년 동안 해놓았던 개혁의 물줄기를 철저히 파괴하고 정조 즉위 이전 상태로 돌려놓아 버렸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란 나라의 희망의 촛불도 꺼진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흘러갔다고 생각했던 역사의 모습들이 현재성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사를 만들도록 하는 것은 백성 즉 국민들이다. 그들의 올바른 선택이 우리 역사를 진보하게 하기도 하고 퇴보하게 하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눈 감아 본다.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애민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이다. 또 생각해본다. 그들에게 정조의 마음과 생각을 배워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