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대통령을 선출하던 12월 19일 국민의 권리부터 행사하고 한국전쟁 초기 미군에 의해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당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와 추풍령을 다녀오기 위해 차를 몰았다.
노근리는 경부고속도로 황간 IC에서 가깝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면 만나는 4번 국도에서 좌측 영동읍 방향으로 달리면 도로변 우측에 ‘노근리사건 현장입니다’라고 써있는 안내판이 보인다.
화살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앞에 노근리사건 역사의 현장인 쌍굴다리가 우뚝 서있다. 노근리사건은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남쪽으로 향하던 피난민들이 미군의 무차별 총격을 받아 300여 명의 희생자가 생긴 대량학살 사건이다. 더구나 대부분이 노인이나 부녀자이고 젖먹이까지 미군의 총탄에 억울하게 희생됐다.
역사 속에 묻혀있던 진실이 모두 밝혀질 만큼 좋은 세상이 되었건만 방명록과 안내책자를 보관하는 낡은 상자, 사진이 잘 보이지 않는 허술한 게시판, 허름한 벽에 사건이 나던 날을 그린 그림이 초입에서 낯설게 맞이한다.
날짜별로 사건개요가 써있고 사건의 위치도가 그려있는 노근리 사건 안내판 옆에 '사건의 진상규명과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현장을 훼손하거나 변형시키는 일이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있다.
쌍굴다리는 역사의 현장이자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근대문화유산이다. 등록문화재 제59호를 알리는 동판이 벽면에 붙어있다. 벽면 곳곳에 있는 총탄자국을 페인트로 표시해 놨다.
두개의 굴다리가 쌍을 이루고 있는 쌍굴다리는 크고 웅장해 위엄이 느껴진다. 쌍굴다리의 한쪽은 차도가 뚫려있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다른 한쪽은 냇물이 흐르는 물길이다. 쌍굴다리 바로 위에 경부선 철로가 놓여있다.
이곳이 역사의 현장임을 알고 있다는 듯 '이곳은 노근리사건 현장입니다(This is NOGEUN-RI Incident Point)'라는 글자가 크게 써있는 입간판 뒤편 경부선 철로 위를 열차가 힘차게 달려간다.
오랜 세월 수많은 이야기와 한을 품고 묵묵히 견뎌낸 다리 밑을 통과하면 노근리 마을이 보이고 이곳에서 본 쌍굴다리의 모습은 앞에서 본 것과 같다. 다만 이곳의 벽면에는 셀 수 없을 만큼 총탄자국이 많다. 총탄자국을 보고 있노라면 사건 당시의 참혹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총탄자국마다 흰색페인트로 세모, 네모, 동그라미를 그려놨는데 세모는 총탄이 박힌 자리, 동그라미는 총탄이 스쳐간 자리, 네모는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가 수없이 그려있는 철도방향 시멘트 벽면은 굵은 철조망으로 총탄자국을 보호하고 있다.
바로 옆 언덕에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옆에 놓여있는 라이터가 켜지지 않아 향불도 피우지 못한 채 위령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억울하게 간 혼령들의 넋을 생각한다면 위령비 주변도 정비하고, 유가족들의 의견도 존중하고, 방문객들을 위한 배려도 필요할 것이다.
쌍굴다리를 바라보고 있는 노근리 마을로 향했다. 노근리는 경부고속도로가 옆으로, 경부선철도와 4번국도가 앞쪽으로 지나고 있는 시골마을이다. 오랫동안 한의 역사와 같이했지만 마을 풍경이 평화롭다.
노근리에서 나와 황간 소재지를 지난 후 4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면 작고 아담한 추풍령 소재지가 나타난다. 조령, 죽령과 함께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추풍령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을 잇는 높이 221m의 고갯길이다.
추풍령은 나라가 관리하는 관로라 예전부터 길이 잘 닦여 있었다. 하지만 과것길의 선비들은 애써 더 멀고 험한 김천시 대항면과 영동군 매곡면 사이의 궤방령을 이용했다. 추풍령은 낙방을 뜻하는 추풍낙엽(秋風落葉)을 연상시키고, 궤방령의 방(榜)자는 합격자 발표 때 붙이는 방(榜)과 같은 글자라는 게 이유였다.
경사가 완만해 승용차를 타고 지나가면 언제 추풍령을 넘어왔는지 모르지만 한양을 오가는 선비들이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야 할 만큼 도로사정이 나쁘던 시절에는 주막거리로 흥청거렸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충북만 통행금지가 없을 때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경북 쪽에서 추풍령으로 술 마시러 오는 술꾼들이 많았다는 얘기도 역사 속에 사라진 지 오래다.
백두대간의 고갯마루인 추풍령은 예로부터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자 영남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 장지현이 의병 2천여 명으로 왜군 2만여 명을 물리쳤으나 다시 밀려온 4만여 명의 왜군에게 패해 전사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 ~중략~ 기적도 숨이 차서 목메어 울고 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우리나라에서 노래로 가장 많이 불려진 령(嶺)이 추풍령이란다. 옛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서려있는 고갯길을 바라보며 가사를 음미하노라면 한 많은 사연과 기적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지금은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지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유명하고, 4번 국도가 추풍령 소재지를 지나며,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 역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신축된 역사의 웅장함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작은 가게들과 부조화를 이루고 있어 아쉽다.
역사 앞을 오가는 사람이 없어 이용객이 적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사의 크기에 비해 대합실이 작다. 어디로 나들이를 떠나는지 노인 두 명이 매표구 앞에서 역무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추풍령의 옛 역사는 대합실에 걸려있는 사진 속에 있다.
1939년에 건립된 추풍령 역의 급수탑이 등록문화재 제47호다. 급수탑은 목탄열차의 과열을 막기 위해 하천에서 물을 끌어들이던 급수시설이다. 급변하는 시류에 맞춰 옛 건물은 사라졌지만 급수탑이 철도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추풍령 역에서 추풍령 IC 방향으로 가다보면 60년 전통의 추풍령할매갈비를 만난다. 충청도 시골에 있는 작은 갈비집이지만 한번 맛본 사람들은 다시 찾게 해 항상 손님들로 넘쳐난다. 남녀를 불문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목청이 커 경상도와 이웃하고 있다는 것도 실감한다.
고추장 양념을 한 돼지갈비는 1인분(200g)에 6000원이라 값이 저렴한데 기름기가 없어 담백하다. 특히 잘게 썰어져 나온 오돌뼈를 숯불에 구워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할매갈비는 전국 체인점을 모집할 정도로 미식가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추풍령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