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 기억 속에 용트림하며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겨울밤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안고 들었던 옛날이야기다.
저녁을 먹고 예닐곱의 꼬맹이들은 이웃집으로 몰려가곤 했다. 그 이웃집엔 이야기꾼으로 소문난 할머니가 계셨다. 우리들이 달려가면 할머닌 귀찮은 표정보다는 생고구마를 한 소쿠리 내다놓았다. 그리고 우리들 손에 손수 깎은 고구마 하나씩을 들려주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구수한 입담엔 무서운 이야기도, 배꼽 빠지는 이야기도, 슬픈 이야기도 있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밤엔 측간에 갈 때도 깨금발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이야기 속의 도깨비나 몽달귀신 같은 것이 갑자기 나타나 ‘네 이놈!’ 하고 뒷덜미를 잡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이야기엔 수더분한 입담이 살아있다
요즘 동화책을 보면 구어의 냄새보다는 문어체의 냄새가 많이 나는 게 사실이다. 특히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를 정리한 책들도 ‘~습니다.’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고 아이들은 그렇게 읽는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전해주는 듯한 구수한 입말보단 읽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서정오의 <철따라 들려주는 옛이야기·겨울 -‘범아이’>는 아이들을 옆에 두고 말하는 입말로 되어있다.
시쳇말로 힘이 빠져 있다. 그저 재미난 이야기를 손자에게 들려주듯 하고 있다. 긴긴 겨울밤, 서민들이 살았던 이야기들이 술술술 흘러나온다.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도 없다. 읽다보면 어느 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슬픈 이야기도, 아픈 이야기도, 고통스런 이야기도 미소가 번진다.
사실 우리 옛이야기엔 배꼽 빠지는 이야기보단 무서운 이야기나 슬픈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 우리 민중들의 아픔이 은연중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약소국가의 슬픔도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그러한 아픔과 슬픔을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려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거기엔 힘이 아닌 지혜로움이 들어있다. 그런데 그 지혜를 발휘하는 사람들은 많이 배운 사람들이나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힘없는 약자들이다.(큰 나라의 협박을 지혜로 해결하는 “슬기로운 아이”)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민중들의 아픔과 삶들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는 그냥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란 단순히 민중들이 꾸며낸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들어왔던 이야기는 ‘말도 안 돼.’ 하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부모에 대한 효의 마음이 희미해질 땐 효도의 중요성을 알리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나눔과 베풂의 중요성을 인식할 땐 구두쇠 같은 인물을 등장시켜 인색함보다 나눔의 삶이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승되었을 것이다.
해서 이러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민중들의 삶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한 예로 ‘할아버지 무덤을 지킨 아이’란 이야기 속엔 권력의 힘으로부터 어떻게 농부의 어린 아들이 할아버지의 무덤을 지켰는가가 나온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권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일이건 서슴지 않은 현실을 은근히 꼬집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범아이”는 인간과 호랑이의 자식으로 태어나 죽음을 맞이한 기구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통해 당시 민중들의 고단한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게으름뱅이 아버지로 인해 호랑이에게 시집간 딸과 그의 아들인 범아이. 못난 아버지 때문에 호랑이의 아내가 되어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호랑이인 아들(범아이)을 낳은 딸. 부모님이 보고 싶어도 호랑이의 부릅뜬 감시에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범아이는 아버지인 호랑이를 속이고 엄마를 친정집에 보낸다. 그리고 그리움에 범아이는 홀로 말라 죽는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 여인네들의 슬픈 한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남성의 권위에 억압당하는 잘못된 현실도 반영되어 있다. 그로인해 슬픈 운명을 지니고 살아가다 죽을 수밖에 없는 범아이는 결국 현실에 절망하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철따라 들려주는 옛이야기·겨울 -‘범아이’>는 서른 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계절에 따라 읽고 들을 수 있게끔 작자는 이야기를 선별하여 책으로 엮어놓았다. 또 이야기 마다 그려진 절집 탱화 같은 그림들은 책의 색다른 맛을 준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는 하지만 함께 읽거나 하진 않는다. 이야기책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책은 아이들에게 먼저 읽으라 하기 전에 엄마나 아빠가 읽은 다음 잠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밤도 긴데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줄까?” 하면서 들려주었으면 하는 책이다.
이야긴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다. 오랜 세월 살아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다. 그 속엔 눈물과 웃음과 한숨, 기쁨이 산안개처럼 살아 움직인다. 입춘을 지난 겨울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삶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려주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