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랑이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고 상상할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에서 사랑의 종류를 말할 때 아가페, 에로스, 플라토닉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이야기하지만 그걸로 사랑을 다 표현했다고 볼 수는 없다. 또 종교적인 의미에서 자비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도 살펴보면 추상적인 것이지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늘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사랑 속에는 미움이라는 가시도 들어있다. 그러고 보면 사랑과 미움은 한 나무에서 자라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미움도 사랑이라는 열매 앞에선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가 될 수 있다.
3년 동안 쓰고 다듬고를 반복했다던 심규완의 <천 개의 눈동자>엔 그 오롯한 사랑들이 가슴 진하게 울렁댄다. 그 사랑의 모습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먼저 은지에 대한 외할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다. 바이올린을 잘 켜는 은지는 부모의 이혼으로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다. 그런 은지는 운동회 날 친구의 잘못으로 사자탈춤을 추다 한쪽 눈을 실명한다.
그런 은지를 위해 할머니는 500개의 목각 보살을 만들기 시작한다. 천 개의 눈동자를 만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망을 갖고 있는 할머니는 은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절에서 목각을 가져와 조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소원대로 천 개의 눈동자가 만들어지는 날 은지는 실명된 눈을 고치게 되고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게 된다.
또 하나, 장애아 요셉에 대한 신부님의 사랑이다. 절름발이이고 귀머거리인 요셉은 고아원에서 데려와 성당에서 보살피고 있는 아이다. 자신의 장애 때문에 늘 외톨이인 요셉은 아이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지만 신부님은 그런 요셉을 늘 사랑으로 대한다.
그런 요셉에게 친구가 생긴다. 은지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빠와 엄마가 살아있고, 아빠는 한국 교향악단 지휘자로 활동하며 단장을 하고 있으며 한국 교향악단에서 음악 경연대회가 있음을 알고 출전을 결심한 은지는 성당에서 바이올린 연습을 하게 된다. 이때 은지와 요셉은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가 된다.
은지와 요셉은 만남과 우정은 장애아와 비장애아, 서로 다른 종교도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허나 무엇보다도 <천 개의 눈동자>에서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눈물을 주는 사랑은 재혁과 은지의 우정이다. 여기에 재혁의 어머니 또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은지와 같은 반 친구인 재혁은 은지를 진심으로 위해주고 가엾은 은지를 위해 무엇이건 해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소년이다. 상미에 의해 은지의 눈이 멀었지만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아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학교 마지막 날 고아원인 ‘천사의 집’ 아이들과 물놀이를 갔다 재혁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요셉을 구하고 주어간다. 하늘나라로 가기 전 재혁의 부모는 재혁의 소원대로 은지에게 자신의 눈을 주고 간다. 그리고 천 개의 눈동자도 완성되어 간다.
재혁의 눈을 가진 은지는 음악 경연대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여 대상을 받은 다음 은지는 재혁의 엄마 품에 안기며 이렇게 말한다.
“아줌마. 고마워요. 재혁이 눈으로 연주했어요.”
말로 하는 사랑은 쉽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헌데 <천 개의 눈동자>엔 어렵고 힘들고 가엾지만 그런 이들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랑이 있다.
부모의 이혼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은지를 위한 재혁과 재혁의 부모의 관심과 사랑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불교신자의 손녀인 은지를 성당에서 바이올린 연습을 하게하고, 장애아인 요셉을 데려다 키우는 신부님의 사랑 또한 종교를 초월한 참사랑이 무언지 깨닫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