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오후, 고향마을의 풍경이 보고 싶어 집을 나섰다. 처음 향한 곳이 집에서 가까운 뒷산이다. 정상부분이 평지인 뒷산은 친구들과 놀이를 하러 즐겨 찾던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야산이지만 사방이 내려다보여 장날이면 시장에 다녀오는 어머님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장소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제법 넓었던 길인데 초입부터 가시덤불이 발길을 가로막는다. 편한 길을 찾으며 이리저리 우회하느라 발걸음이 더뎠지만 숲속에서 큰 밤송이를 제법 많이 매달고 있는 밤나무를 만나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알밤을 주웠다.
꼬마들이 씨름과 레슬링을 하며 힘자랑을 하던 정상에 잡목이 가득 들어차있다. 야트막한 산이 빈 공간도 없이 꽉 막히니 더 답답하다. 그래도 어른들의 '장보따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궁금해 하던 어린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정상을 벗어나니 친구네 종산에서 여러 기의 묘지들이 맞이한다.
묘지 아래로 아래뜸이 보인다. 예전에는 아래뜸으로 불리던 아랫마을에 30여 집, 위뜸으로 불리던 윗마을에 예닐곱 집이 살았다. 청주시로 편입된 게 25년 전이지만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라 지금도 가구 수가 비슷하다. 객지생활하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금방 옛 추억을 떠올릴 만큼 외부의 모습도 그대로다.
내 고향의 정확한 지명은 청주시 흥덕구 내곡동 2구다. 작은 내곡, 작은 안골, 작은 소래울이라는 이름에 더 정이 가는 마을을 다시 아래뜸 위뜸으로 나눴다. 커서 알게 되었지만 한자로 내곡(內谷)이 안골이라 1구인 큰 내곡은 큰 안골과 큰 소래울, 2구인 작은 내곡은 작은 안골과 작은 소래울로 불렀다.
고향마을 앞으로 층수를 높이고 있는 건설현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동산개발업체 신영이 흥덕구 대농 지구에 건설하고 있는 신도심 주거 및 상업 복합타운이다. 공사현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사라진 대농의 역사가 생각났다.
현재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도 다 피 끓는 젊은이들이 월남전에 참전해 목숨을 잃고, 광부와 간호사들이 낯선 서독에서, 근로자들이 무더운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한때는 이곳 대농도 많은 여공들이 공순이 소리를 들어가며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던 곳이다.
몇 년 후면 앞에 보이는 이곳의 풍경도 새롭게 바뀐다. 신영컨소시엄과 청주시가 조성하는 청주 테크노폴리스가 내년 초 공사에 착수하면 옛 지형이 모두 사라지고 대신 복합산업단지가 들어선다.
철길 안쪽의 작은 내곡은 사업지구에서 제외돼 다행이지만 당장 고향을 떠나야 할 큰 내곡 사람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관에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양새라면 보기에 좋지 않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농토와 고향을 잃어야 하는 이주민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게 먼저여야 한다. 청주 테크노폴리스 때문에 고향의 반쪽과 모교를 잃어야할 신세다.
건설현장 오른편으로 부모산(父母山)이 보인다. 다정함과 친근함이 묻어나는 부모(父母)와 엄숙함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산(山)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부모와 자식 간의 정과 효를 떠올리게 하는 산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산으로 소풍을 갔었다. 왕복 30여리가 넘는 길을 걷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오죽하면 어린 시절에는 높이가 232m에 불과한 부모산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인 줄 알았을까.
들판으로 나가니 결실을 앞둔 벼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찰벼를 심은 논은 새를 쫓느라 고생을 한다. 끈기가 적어 밥 지을 때 사용하는 쌀이 메벼를 도정한 멥쌀이고, 찰기가 있어 인절미 만들 때 사용하는 쌀이 찰벼를 도정한 찹쌀이다. 벼이삭을 보고 메벼와 찰벼를 구분하는 것도 다 농촌에서 자란 덕이다.
가을걷이를 앞둔 시기인데도 수리조합 도랑에 물이 많이 흐른다. 여름철이면 소 풀 뜯기는 게 일이던 어린 시절에는 수리조합 도랑이 꼬마들의 놀이터였다. 도랑가에 목화밭이 있어 다래도 따먹고, 물에 수박이 둥둥 떠내려 오는 재수 좋은 날도 있었다.
미호평야의 일부인 까치내들은 청주 주변에서는 제법 넓은 들이다. 중부고속도로가 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들 끝으로 흐르는 까치내 너머로 오창과 옥산의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고속도로 굴다리를 빠져나오자 바로 방죽을 만난다. 천수답이 많던 시절에는 저수지 역할을 톡톡히 할 만큼 제법 넓었는데 여러 가지 공사를 하며 많이 줄어들었다. 몇 년에 한번 물을 빼는 날이면 물고기와 조개가 지천이었고, 깊은 물까지 꽝꽝 얼어붙는 겨울철에는 꼬마들이 즐겨찾는 스케이트장이었다.
폼이 그럴듯한 허수아비가 논두렁에 서있고, 둥근 나무가 입구에서 마을을 감춘다. 줄기가 가늘고 나뭇잎이 적던 예전부터 마을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던 느티나무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몸을 키워 지금은 둘레가 두 아름이 넘는다.
여전히 동네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쉼터가 되고 있지만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나무 밑을 지키던 어른들은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들이 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돌고 도는 인생살이와 같이 옛길을 돌고 돌다보니 마을 앞으로 충북선 철도가 지나고, 오른편 마을 아래로 중부고속도로가 보이는 위뜸의 고향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