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근 길에 터널 근처를 지나는데 몇 몇 젊은분들께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익숙하지 않았던 풍경이기에 무슨 사연이 있을까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피켓의 내용을 살펴보니 한결같이 ‘일제고사 반대’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번 진단평가는 초등하교 4학년부터 중학교 학생까지를 대상으로 국영수와 사회, 과학 시험을 ‘일제히’ 보게 된다. 피켓 시위는 결국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교사나 시민단체 소속 회원들의 의사표시 였다.
일제고사는 전국의 해당 학교급과 학년에 속하는 학생들이 동시에 시험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물론 시험에 따른 성적도 나온다. 문제는 이것이 내신성적을 좌우하거나 수학능력시험처럼 대학진학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속에 함정이 있다. 일제고사의 성적에 따라 학생들의 수준의 결정되고 심지어는 우열반 편성의 기준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일제고사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열반에 속하고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은 우반에 속하여 체계적인 관리와 지도를 받는 일도 있다.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교육 당국은 일제고사를 통하여 전국 학생들의 성적 분포도를 살펴보고 성적이 떨어지는 학교나 학생들에게는 좀 더 많은 지원을 하겠다는 의도를 밝혔지만 그것은 사실상 학교 간 경쟁을 숨기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즉 말하자면 이미 성적이 공개되는 마당에 실력이 떨어지는 학교에 학부모들은 자녀를 맡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학부모들은 성적이 뛰어난 학교에 자녀를 맡기지 그렇지 않은 학교에 자녀를 맡길 리는 만무하다.
일제고사의 폐해는 우리 학생들을 지나친 경쟁으로 몰아가서 자신이 관심을 갖고 흥미있는 분야에 대한 능력을 발현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세계는 지금 총성없는 교육전쟁으로 인재를 키우기 위해 무한 경쟁 상태에 돌입한 지 오래다. 인재는 거저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소질과 적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런 점에서 이번과 같은 도구과목 중심의 일제고사는 오히려 아이들의 창의력을 고사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초·중·고에서는 모든 교육활동은 궁극적으로 대학입시와 연관관계를 맺고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의 대입제도는 학생들의 잠재 가능성과 소질을 중시하는 대입사정관제로 나아가고 있다. 사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특정 영역에서 자신의 적성을 충실히 구현했다고 판단하는 학생들의 경우 설령 시험점수가 부족하더라도 과감하게 선발하여 대학의 인재로 키우겠다는 것이 입학사정관제의 취지다.
초·중·고 일제고사는 입학사정관제의 취지와 전형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재고의 소지가 분명히 있다. 일제고사를 치르기 보다는 차라리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진로교육에 전념함으로서 학생들이 어떤 분야에 관심과 흥미를 파악하여 그에 적합한 교육활동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세계 최고의 갑부인 빌게이츠도 우리 아이들처럼 일제고사를 치르며 주입식 교육으로 일관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세계 최고의 기업을 세우고 인류 사회에 공헌하지 못했을 것이다. 빌게이츠는 시험의 부담에서 벗어나 다양한 독서와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한 도전을 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도 빌게이츠와 같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방식은 시급히 버리고 아이들의 개성과 창의력을 찾아줄 수 있는 교육에 매진하는 것이 교육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