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일파만파로 떠돌고 있는 패륜녀에 대한 실제 장면의 녹음이 그다지 강하게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 무엇이 이런 장면에도 자극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는가? 왜 이런 장면만 목격하게 되면 허탈감과 오늘의 교육에 자괴감을 느껴야 할까? 초중고 학교 장에서는 이런 말들이 잘 정화되었는데 소위 서울 우수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일까?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개똥녀에 대한 이미지가 왜 갑자기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까? 대학문화의 선과 악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간의 대립이 아닌 위아래도 없는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정저와일까?
요즘 언어에 대한 폭력은 과연 순화의 차원으로 가고 있을까? 예전에는 사물을 보고 좋으면 “야, 참 좋다”라고 했는데 요즘은 “완전 좋다”라고 한다. 발음을 해도 딱딱하게 들린다. 자주 들으니 역겨워 지게 된다.
예전에는 남자 아이들이 비어로 “좆나 좋다”라는 용어를 친구들에게 자주 쓰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여학생이 이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마치 약방에 감초처럼 사용한다. 그래서 여학생들에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반문해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그 뜻도 모르고 그냥 사용한다고 했다.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예사로 들추어 내어 겉으로 표현하는 데도 부끄러움이라곤 찾아볼 구석이 없다. 남성이 성교를 할 때 사정을 하고 난 뒤 만족감을 느낀다고 하는 의미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여학생은 그런 말을 여자가 왜 못쓰느냐고 반문하였다. 못쓰게 하는 것이 오히려 성차별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참으로 어디에서 말을 끄집어 내어 어디에서 말을 마쳐야 할 지 대중이 잡히지 않는 것이 오늘의 청소년의 언어세계요, 마음일까?
어른을 보고도 인사를 하는 일이 없다 보니 웃어른을 보고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나는 것이 마치 뱀이 먹이를 찾기 위해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개를 숙이는 겸손한 자세를 몸에 익혀야 상대방에게 바른 말을 쓰게 되고 비어를 쓰는 것이 실례가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고려 무신정권이 난을 일으키게 된 것도 문신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무신인 대장군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붙여 태우는 파렴치한 행동에 무신들은 무력으로 문신들을 죽여 버린 것이다. 아무리 무관이 문신보다 낮은 벼슬이기로서니 무관의 최고 대장의 수염을 문신의 아들이 많은 무신들 앞에서 태우는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에 무신들은 단합하여 일어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개똥녀에 대한 여론이 왜 그토록 강했던가? 왜 경희대 여대생의 패륜적 행위를 그토록 비난하고 있는가? 다름 아니다. 우리 사회가 지켜가야 할 것들이 너무 빨리 사라지고 서구의 물결이 재빨리 자리잡으매 나타나는 병리현상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을 한 발짝 양보하여 남을 배려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 청춘을 불태워 얻은 명문대 입학이 일장춘몽이 아니기를 다시 한번 기대해 본다.
고 3학년이라면 마치 대학생의 특권보다 더 강세를 나타내려고 한다. 머리도 길러도 되고, 교복도 제 멋대로 입어도 된다는 생각이 학생들에게 편집과 아집만을 더 심어주고 있지는 않는 지 조용히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학교현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회초리를 맞으면서도 바른 자세로 살아가던 그때의 그 한국적 교육 전통은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대학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초등학교에서도 전자게임으로 일관하는 학생들, 그들에게 과연 100만불 가치는 무엇일까? 고급 의복, 고급 게임기, 고액 과외, 우수 대학 진학 등등이 오늘의 학교현장의 주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