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를 좋아한다. 내가 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수십 년 전 중학교 3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학교는 중고등학교가 한 캠퍼스 안에 있었는데 고등학교는 여학생 숫자가 적기는 하였지만 남녀공학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늦가을쯤으로 기억된다. 하루는 우리 반 교실 뒤편 게시판에 시가 등사된 종이가 하나 붙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의 '부두'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인천일보 주체 전국학생 백일장에서 입상한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아마 나는 그 이전엔 시 한 편 읽은 기억도 없고 이름을 알고 있는 시인조차 한 명도 없었다. 시에는 관심도 없었고 한 번도 시를 써본 기억도 없다. 이런 상태에서 내용도 잘 모르고 읽었던 그 여학생의 시 한편이 내게 새로운 계기를 주었는데 그것은 그 시를 읽고 그 여학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 나는 시를 쓴 여학생이 궁금했고 마침내 확인했다.
그 후 그 여학생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급기야 편지를 쓰며 남몰래 짝사랑했다. 여학생은 내 마음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고 내 일기장은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 짝사랑은 2년 쯤 계속되다가 그 여학생이 졸업하고 떠남으로써 미련만 잔뜩 남기고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그 여학생과 공유하고 있는 추억은 별로 없지만 지극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첫사랑의 소녀로 지금까지 나는 그 여학생의 모습이며 표정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이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비로소 나는 문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문예부에 가입하여 시를 쓰고 교지를 편집하고 백일장에 참가하곤 했다. 교내백일장에 입선하고 교지에 시를 발표하고 성균관대, 건국대 등 대학백일장에 참가하곤 했던 것이다. 내 영혼이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여학생은 내게 문학의 문을 열어준 은인이나 다름없다. 몇 번 편지를 쓰고 만나달라고 부탁했지만 한 번도 답장을 주지 않고 만나 주지 않았지만 내 사춘기 시절에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소중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이 무렵에 누군가 내게 문학을 가르쳐 주었다면 나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확고한 기반을 닦은 시인으로 명성을 얻어 활동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그 때 국내시인들은 거의 도외시하고 어설프게 번역된 서구 시인들의 시에 심취했는데 이것이 내 문학을 거의 답보상태로 만들고, 엉뚱하고 비효과적인 시 공부를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오랜 후일의 일이다. 그때 나는 한국 시인 한국문학에 좀 더 심취했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거의 15년 이상을 문학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다. 학업문제, 군대문제, 취업문제, 결혼문제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30대 중반에 다시 시를 읽고 쓰고 문예지를 구입해보고 했는데 이것은 고등학교 때 문예부 활동을 하고, 한 여학생을 짝사랑하면서 싹을 틔웠던 그 경험 때문이다. 학창시절 체험이 그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학창시절에 마음 밭에 떨어진 씨앗 하나가 언젠가는 반드시 발아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고 믿는다.
그때 시인이 되자고 혼자 일기장에 썼던 것이 내 마음에 시의 씨를 뿌린 것이라고 나는 지금 믿고 있다. 서른일곱 살에 나는 첫 시집을 내고 문단에 등단하여 지금까지 여덟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수필집을 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시인이긴 하지만 내 시는 내 기도와도 같아서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때로는 역경을 딛고 일어서 다시 희망을 품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평생 시를 사랑하고 시를 쓰며 살 것이다. 이제 직장에서도 퇴직했으니 오로지 전업시인으로, 모든 체험을 시에 수렴하며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좋은 시는 어떤 시인가.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 깊은 울림이 있는 시, 마음에 전율을 일으킬 만큼 감동적인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고 있다. 이번 가을엔 좋은 시집 한 권씩 구입하여 읽어보면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시인 몇 분 소개하니 참고 하기 바란다. 조병화 시인, 신경림 시인, 김기택 시인, 유자효 시인, 구상 시인, 김광규 시인, 김상현 시인… 무수히 많은 시인 중에 읽기 수월한 시인 몇 분 소개해 보았다. 자, 그럼 필자의 졸시 하나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가을은 길다
추수하는 농부 갈걷이 끝낼 때까지
만선의 깃발 항구에 닿을 때까지
산골짜기 도토리 익을 때까지
다람쥐 갈무리 마칠 때까지
멍석 위에 붉은 고추 마를 때까지
할머니 이마 땀방울 식을 때까지
들녘에 꽃씨 다 여물 때까지
오고가는 철새 먼 여행 마칠 때까지
<졸시 '가을은 길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