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읽기의 즐거움

2012.08.13 14:52:00

잡지는 주변에 흔하다. 책으로 쳐 주지도 않는다. 그저 잡스러운 것 정도로 취급한다. 특히 잡지는 정기적으로 발행되기 때문에 시기가 지나면 폐지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책을 모으는 사람도 잡지는 모으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잡지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오랫동안 잡지와 함께 하고 있다.

내가 잡지에 첫 손길을 뻗은 것은 대학 때였다. 유신 정권의 몰락으로 대학이 긴 휴교에 들어갔다. 그때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간 곳이 청계천이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당시에 청계천은 아늑한 공간이었다. 청계천에서 ‘사상계’ 잡지를 통해, 4․19 혁명 당시 학생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그리고 전설처럼 알고 있던 5․16 혁명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잡지더미에서 실체를 알았다. 잡지 ‘사상계’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순간 나의 심장은 뜨거워졌다. 나는 4월호, 5월호,…7월호를 샀다. 없는 6월호를 찾기 위해 청계천을 다 뒤졌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이 서점 저 서점을 헤맸다. 나는 책을 사러 다닌 것이 아니라 아무도 가르쳐주진 않던 역사의 진실을 찾아다녔다.

책방 구석에 허름하게 버려져 있는 ‘사상계’라는 잡지는 역사의 진실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은 흐르지만 진실은 사멸하지 않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기성 정치 세력이 진실을 덮으려고 폐간이라는 강제 수단을 썼지만 구석에서 의연하게 남아 있었다. ‘사상계’는 죽지 않고 우리 가슴에, 우리 역사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5공화국의 출범으로 대학은 활기를 찾았지만, 최루탄 냄새는 여전했다. 나는 군 제대 후 대학 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시대를 포용하지 못하는 허기에 차 있었다. 그래서 우연히 잡지 창간호를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 창간호는 회사가 세상에 처음 내놓으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책이다. 책의 호적부가 되고 속간되어지고 있는 잡지의 근간이 된다. 그 책의 첫 번째를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우월감이 나를 달치게 했다.

오래된 잡지 창간호는 묘한 매력이 있다. 화려하게 탄생했지만 세상의 그늘로 밀려난 슬픈 운명처럼 느껴진다.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내 삶과 비슷했다.

잡지를 모으는 일은 책을 찾아다니는 즐거움이 있었다. 생활이 답답하고 피곤하면 서점으로 간다. 책을 만져보고 구경하는 도락(道樂)이 그럴싸하다. 창간호를 사러 고서점(古書店)을 찾는 날은 주머니에 돈도 두둑이 넣고 가지만 전날 좋은 꿈을 꾸어야 한다. 욕심나는 책을 발견하고 돈이 부족해서 못 살 때는 팔리지 않도록 주인 몰래 서점 구석에 깊숙이 감춰놓고 돌아왔다. 뒷날 다시 돈을 모아 가지고 가서 그 책이 그대로 있을 때는 잃어버렸던 귀중품을 찾은 것처럼 기뻤다.

잡지 읽기는 또 다른 공부였다. 잡지도 물론 학문을 다루고 있지만, 그곳에는 삶이 있고, 현실이 있었다. 학문이 관념적이라면 잡지는 현실적이었다. 강의실은 고답적인 학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불편했다. 하지만 잡지는 현실과의 소통을 추구했다. 그래서 잡지 읽기는 신선함이 있었고, 여유로움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잡지 읽기는 중학교 때부터였다. 그것은 ‘선데이 서울’이라는 잡지였다. 그 잡지는 우리 또래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다. 동네 형들이 보여주던 그 잡지는 늘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 잡지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당시는 어른들 몰래 숨어서 봤지만, 그 잡지가 우리의 유일한 성교육 교재였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날에 낡고 오래된 잡지가 나를 즐겁게 했다면 지금은 신간 잡지가 나를 뜨겁게 한다. 교직에 들어서도 책은 늘 나에게 목마름을 해갈해 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서점에 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잡지 정기 구독을 했다. 그러면서 늘 빠지지 않는 것이 문예지였다. 대학 때부터 가을이 되면 신문 신춘문예 공고를 오려가지고 다녔다. 정작 글도 못 쓰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중압감에 몸과 마음이 괴로웠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 병이 자연 치유됐지만 여전히 내면의 호수에는 갈등의 수초가 자라고 있었다.

오늘도 집에는 잡지가 서너 권 도착했다. 아내는 잡지를 읽지도 않으면서 돈만 낸다고 끊기를 재촉한다. 하지만 나는 당장 읽지 않아도 좋다. 그 잡지는 언젠가 내 손에 들리게 되고, 위대한 삶을 공급받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잡지를 모으는 일은 그 책을 전부 읽겠다는 미래의 약속이 내재하기 때문에 즐겁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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