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차를 타고 조금만 달려 나가면 넓은 들과 산이 맑은 젊음의 공기를 내품고, 시원한 바람은 나에게 꼬맹이 입맞춤을 한다. 차를 세우고 하늘을 보면서, 들녘을 바라보면서 가을의 풍성함을 느낀다. 들판의 누런 벼들은 가을의 햇살을 동경하고 햇살은 벼를 따듯한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감싼다. 태풍이 지나간 들판이지만 농부들의 부지런한 손놀림은 벼의 무르익음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새들이 지저귀는 노동요는 농부의 힘든 하루를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한다. 그러기에 농부는 아침의 햇살을 타고 나타나는 새들의 소리에 하루를 시작하고, 석양에 지는 노을로 하루를 접는다.
높고 높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니 언제 폭풍이 몰아친 적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구름들은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 깨끗한 유리알 같은 푸른 수정을 보여주는 하늘의 오묘함이 마치 새색시 시집을 가는 날 집안 청소를 해 놓은 것 같아 보인다.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가을 하늘을 정복하여 먹구름을 다 물리쳤단 말인가? 한여름의 먹구름은 손오공의 재주를 이겨내지 못해 사라진 것일까? 푸르고 푸른 하늘의 넓은 대지에 무엇을 심어서 저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워 꽃을 피울까? 구름꽃을 심을까? 푸른 유치원 아이들의 놀이터를 만들까? 아니면 고요한 숲속에 잠자는 정원 별장을 만들까? 아니다. 천진무구한 곳에는 순수가 꽃피는 향학당(向學堂)을 지어서 학업에 열중하고자 하는 자들의 쉼터를 만들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고요한 곳에서 꽃피는 이상향은 더욱 더 높은 꿈의 절개를 지켜갈 것이고, 티없이 맑은 눈동자를 통해서 들어오는 지식은 세상을 밝게 비추는 광명이 될 것이다.
이처럼 가을은 배우는 자에게 안식의 삶을 만들어 주고 불 없이도 학업에 매진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니 가을 하늘이 주는 거대한 숭고함은 아무리 예찬을 하여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고 별을 노래하면서 순수한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도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민족정신을 하늘에서 찾았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책을 통해서 길러지고, 이것이 가을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맑은 이상을 다짐하는 것이 바로 식민지 시대의 참된 민족정신이었던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민족정신은 무엇일까? 가을 하늘에 떠가는 일시적인 구름일까? 아니면 가을 하늘을 쳐다보면서 순수한 맑은 이상을 노래한 옛 성인들의 얼을 되새기는 것일까? 가을 하늘은 아무리 쳐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숨은 지혜를 알려 주는 창고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