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오면 생각나는 것들 3-- 조청 단지
설날이 돌아오면 주부들이 하는 큰 일 중의 하나가 조청을 곱는 일이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에 시골에서는 설날에 조청을 고우면 이것이 일 년 내내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단 것의 재료를 만드는 일이 되었다.
혹시라도 단 ㅈ것을 먹을 일이 생기거나 어르신들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설에 만든 조청을 단지에 모셔두고 일 년 내내 꿀 대신으로 새ㅣ용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조청을 곱는 일이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가을에 보리씨를 뿌리고 남겨주었던 보리를 물에 불려서 시루에 담아서 놓아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주곤 하면 보리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리 싹이 나오기 시작하면 2,3일 동안 더 싹을 키워서 싹의 길이가 1~3cm정도가 되면 멍석에 널어서 말린다. 이것을 엿기름이라고 하는 식혜의 원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잘 말린 엿기름을 맷돌에 갈면 엿기름가루가 되는 것이다.
조청을 만들려면 우선 식혜를 만들어야 한다. 엿기름을 물에 불리도록 충분히 물을 붓고 담가두고 나서 고두밥을 한다. 고두밥은 술을 빚을 때 하는 밥을 일컫는데 보통 먹는 밥보다 더 되고 고슬 하게 짓는다. 엿기름을 담가둔 것을 잘 주무르면서 엿기름물을 만들어서 잘 가라앉혀 두었다가 윗물만을 따라서 붓고 고두밥을 넣어서 훌렁하게 저어서 물독에 담아서 아랫목에 놓고 이불로 싸서 하룻밤을 숙성시킨다. 24시간 정도 하면 가라앉았던 밥풀이 위로 떠오르면서 달착지근한 식혜가 된다. 엿기름물 남은 것과 나머지 엿기름을 잘 주물러 받아낸 것을 합쳐 가라앉힌 엿기름물을 잘 따라서 식혜가 된 것과 함께 솥에 넣고 끓이면 한 솥 가득 식혜가 된다.
이 식혜를 그냥 식혜로 먹기도 하지만 조청을 만들기 위해서는 식혜를 체에 밭쳐서 물만 따라낸다. 그리고 밥풀은 꼭 짜고 나서 버리게 된다. 물론 그냥 버리지 않고 어린아이들의 간식거리로 주는데 어린 시절이 식혜 밥이 얼마나 달콤하고 맛있는지 잔뜩 먹고 나면 당분이 너무 많아서 배가 아프곤 하였다.
식혜에서 물만 따로 받아낸 물<식혜물>을 솥에 넣고 더 진하고 걸쭉해지도록 끓이는 것을 곱는다고 한다. 한나절 정도 장작 물에 고운 조청은 마치 꿀처럼 걸쭉하고 진하게 된다. 타지 않게 저어가면서 곱던 주부들은 주걱으로 조청을 떠올려서 길게 줄을 이루고 바닥에 닿을 정도로 걸쭉해지면 곱기를 그친다. 이제 조청이 다 된 것이다.
이 조청을 한 단지 담아서 방안의 놀은 다락방이나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잘 간직해주는데 이것이 꿀 대신이고 유일하게 감미료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이 조청<요즘 시장에서 파는 요리당 중에서 약간 검붉은 빛을 띠는 것과 같은 모양과 색, 맛을 지녔음 : 요리당 중에 조청이라 쓴 것도 보임>은 설날에 집에서 만든 인절미나 쑥떡을 먹을 때에 찍어먹는 재료가 되는 것으로 설 준비물 중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 여기서 내 어린 시절에 이웃에서 일어난 조청단지에 얽힌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리죠.
조청 단지
“필호야, 문턱이 우디냐?”
어머니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팔을 휘두르며 소리칩니다. 먼 옛날 게딱지같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산골 마을에서 끼니조차 이어가기가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렇게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설날, 추석날은 물론 삼질, 초파일, 단오, 유두, 칠석, 백중 등 갖가지 명절을 잊지 않고 쇠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지요. 이 무렵에는 지금처럼 군것질을 할 만큼 생활에 여유도 없었지만,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요즘처럼 맛있는 과자와 빵 같은 맛있는 음식도 없고, 마음대로 사먹을 수 있는 상점도 없었습니다.
시골에서는 몇 십리를 걸어서 가는 장날이나 되어야 과자라도 몇 개 살 수 있었고, 엿장수가 마을을 찾아오는 날이라야 단물이 흐르는 엿을 사먹을 수 있을 뿐 구멍가게도 있을 리 없고, 더더구나 수퍼나 연쇄점 같은 가게는 서울에도 없을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명절이 되면 보통 때에 먹을 수 없는 색다른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먼 남쪽 바닷가에서 조금 산골로 들어간 산골 마을에 다섯 살짜리 필호와 세 살짜리 필순이 남매를 데리고 동네에서 제일 조그맣고 초라한 오두막집에서 엄마 혼자서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하여 1년 내내 쌀밥 한 그릇을 마음놓고 먹여 보지 못한 필호 어머니였기에 설날이 가까워지자 큰맘 먹고 좁쌀로 조청을 한 단지 만들어 보물처럼 아끼는 단지에 담아 두고, 찹쌀에 쑥을 듬뿍 넣어서 쑥떡도 한 함지박 모촘하게 해두었습니다.
1년 내내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 어린것들에게 설날만이라도 배불리 먹여 주고 싶었고, 사실은 엄마도 무척이나 떡이 먹고 싶었지만 참아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먹고 싶다고 떡을 해먹고 나면 새 봄엔 식량이 떨어져서 굶든지 굶지 않으려면 누구네 집에서 장리쌀(1년에 50% 이자를 물어야 하는 빚)을 얻어먹어야 하기 때문에 참고 남의 집 잔치나 제삿날이면 음식품(음식을 만드는 일을 돕는)을 팔아서 품삯도 받고 먹고 싶은 음식도 얻어먹으면서 참아 왔지만 남의 집 음식을 얻어먹는 게 어디 흡족하게 얻어먹을 수 있었겠어요.
말랑말랑하게 찐 쑥떡을 한 덩이 뚝 떼어서 초코렛 빛이 나는 걸쭉한 조청(물엿)을 듬뿍 찍어 먹는 맛이란 어디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좋았습니다.
손가락에 묻은 떡과 조청을 빨아 먹다보면 그만 혓바닥까지 따라 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한 조각이라도 더 먹이려고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귀여운 아이들을 들여다보면서 먹이고 또 먹여 주었습니다. 아직 다섯 살짜리이지만 건강하고 아직 배불리 먹어 보지 못한 필호는 어지간히 먹을 탐이 심해서 언제나 더 달라고 조르기 일쑤이고, 딸따니 필순이도 조청을 찍은 쑥떡이 그리도 맛있는지 깜찍하게 생긴 그 까만 눈동자를 굴리면서 오물오물 씹어 삼키고선 입술이 닳도록 빨아댑니다.
이렇게 맛있게 먹다보니 한 단지 그득하던 조청과 함지박 모춤하던 쑥떡이 며칠도 가기 전에 조금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필호 엄마는 너무나 아까와서 밑바닥에 조금 남은 조청을 아끼고 아끼면서 어린것들을 달래서 한 입 먹이고는
“참아라 !”
두 입 먹이고 나서
“먹고 싶더라도 조금만 참아라!”
하고 아꼈지만 열흘이 되기도 전에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다 먹어버린 조청이 자꾸만 나오는 요술단지도 아니건만 어머니는 떡으로 닦고 또 닦아 먹어서 단지 바닥이 다 닳아버릴 만큼 닦아 먹고서도 그냥 풍덩 물에 씻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없는 사이에 아까운 조청단지를 씻으려고 내어놓고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훑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손가락에 묻어 나오는 게 없었습니다.
‘헐 수 없제. 쌔로 훑어 봐야제.“
필호 어머니는 조청단지를 핥기 시작하였습니다. 큰 수박 만큼한 항아리를 주둥이 쪽에서 핥아보고 점점 안쪽으로 핥을수록 조청이 조금씩 더 많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쪼끔만 더, 쪼끔만 더.’
하다가 머리는 자꾸만 항아리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핥기에 정신이 팔린 필호 어머니는 그만 덥썩 항아리를 덮어쓰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큰일 나부렀구만,’
머리를 빼려 했지만 뒷머리에 틀은 낭자와 비녀가 단지에 걸려서 뺄 수가 없습니다. 손을 넣어서 머리를 풀어 보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들어갈 틈새가 없었습니다. 숨이 막힐 것 같았으나 쉽게 빠져 나올 방법이 없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하는 수 없이 소리를 쳐보았습니다.
“필호야, 필호야 ! 아이 문턱이 어디라냐 ?”
그러나 단지 속에서 지른 소리에 귀청이 터질 듯 쩌렁쩌렁 울려서 귀만 아플 뿐 밖에서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문턱을 찾았습니다.
‘문턱을 찾아서 박치기를 하문 이놈의 항아리 박살이 나겄제?’
호박가면을 쓰고 가장행렬에 나온 사람처럼 두 팔을 허우적거립니다. 금방 까지도 그렇게 고맙고 아깝던 조청단지가 원수만 같고 어서 깨뜨려서라도 벗어 던지고 싶습니다. 두 걸음만 걸어가면 어디든지 벽이 만져질 좁은 방이건만 허둥지둥 제자리를 맴돌고 있으니 문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다시 팔을 휘두르다 간신히 벽을 스치고 나서
“옳제, 여그 그만.”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벽을 더듬어 문을 밀어 젖혔습니다.
“엄니!"
뛰어들던 필호가 문에 마당까지 떠밀려 가서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아아앙--”
우렁찬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치려고 발을 뻗치려다가 조청단지를 덮어쓴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엄니이 !”
하고 두 눈이 둥그래져서 소리를 치는 순간
“쿵, 짤그랑!”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조청단지는 박살이 나고, 얼굴이 시뻘개진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와아, 아하하하하! 엄니가 단지 속에서 나왔다. 단지 속에서 나왔당께 ! 아하하하.”
필호는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깔깔거립니다. 어머니는 눈에서 불이 번쩍 나도록 이마가 아팠지만 깨어진 단지 조각을 주어서 맞춰 보면서
“내가 미쳤제, 미쳤어.”
하고 중얼거립니다. 필호는 울상이 되어서 어머니의 이마를 만져보며 물어 봅니다.
“엄니, 안 아퍼?”
“필호야.........”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필호를 꼬옥 껴안고 눈물만 흘립니다.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는 듯한 앞산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립니다.
“이제 곧 봄이 오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