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밖에 눈이 와 있었다. 제법 내린 듯 하여서 얼른 옷을 입고 나갔다.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출근을 할 둘째를 위해서 눈을 말끔하게 치워주고 싶었다. 또 두 아이들의 공부방에 올 아이들이 눈이 있어서 불편을 겪지 않도록 해주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눈을 치우느라고 시간이 꽤 걸렸다. 눈이 약간 젖어있고, 잘 뭉쳐지는 눈이기에 마당 한편의 눈을 치우지 않고 그냥 놓아두었다. 손자손녀들이 나와서 눈사람을 만들면 딱 좋을 눈이어서 만지면서 놀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아침 운동 시간쯤인 약 40분 정도 걸려서 눈을 치우고 입구의 비탈길에는 소금이라도 뿌려서 말끔하게 정리를 하였다. 아침을 먹고 기분 좋게 헬스장으로 향했다. 오늘 SBS 방송의 전화 인터뷰가 예정이 되어 있었기에 혹시 이메일이 왔는가 확인을 하였지만, 메일은 들어와 있지 않아서 그냥 포기하고 운동이나 하고 오려고 나섰다. 시간을 많이 잡을 수가 없어서 좀 서둘러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약간 피곤하다. ‘잠시 쉬었다가 하자‘고 누워서 잠이 꼬박 들었던가보다 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얼른 일어나서 전화를 받으니 어제 이메일로 연락을 주었던 뉴질랜드에 사는 제자의 전화이었다.
내가 학급 담임만을 27년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 2년 겹치기를 한 것이 4번이었던가 하니 어쨌든 매년 50명씩으로 잡아도 1,000명이 넘는 아이들과 함께 했던 것 같은데,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아직도 기억하고 찾아주는 제자들이 가끔은 있으니, 이것이 교직에 종사한 사람의 가장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광자. 1975년 보성남초등학교에서 5학년 2반 담임을 하였을 때 담임을 하였던 아이이다. 아니 이제는 50쯤이 된 중년여성이 되었겠지.
“선생님 이광자예요. 너무 반가워요.”
이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정말 이웃집 아니 바로 곁에서 이야기하듯 선명한 전화 통화가 반갑고, 거의 40년이 지난 세월이 거꾸로 돌아가 전남 보성읍 보성남초등학교로 재빨리 나의 머릿속은 바뀌고 있었다.
1975년 내가 보성남 초등학교에 간지 3년째에 나는 5학년을 맡았었다. 바로 전해에 맡았던 아이들은 4학년 때 12월 5일에 발령이 나서 그대로 데리고 올라가 5, 6학년을 담임해서 졸업까지 시킨 다음 해였다.
보성남초는 나의 일생에 42년 교직 경력 중에서 가장 화려한 활동을 하였던 곳이었다. [학교공원화 사업]이라는 것이 시작 되어서 전국에서 가장 시범적인 학교 10곳 중의하나가 될 만큼 학교를 아름답게 꾸며서 휴일이면 구경꾼들이 거의 학생들만큼이나 모여들 정도이었으니 참 보람이 있었다. 이 학교 공원화 사업을 주도한 것은 교장 선생님과 손 재주꾼 박성남 선생님, 그리고 나무와 꽃가꾸기에 자신이 있던 나의 힘을 합친 작품이었다.
교장선생님의 명이 떨어지면 박선생님은 콘크리트로 조형물을 만들고, 나는 나무와 꽃을 배치하여 심고 화단의 조경을 맡아 하였었다. 주말에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몰려와서 필름 한통을 몽땅 찍었노라고 하는 얘기를 들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던 그 학교에서 한창 작업을 하면서 맡았던 아이들이었다. 사실은 그래서 다른 반보다 작업도 좀 더 많이 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남에게 맡길 수 없으니 우리 반 아이들이 동원 되곤 하였기 때문이었다.
통화를 시작하여서 보성남교의 이야기가 진행이 되는 동안 이런 즐거운 추억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약 20여분이나 통화를 하였다. 뉴질랜드에서 유학생들의 하숙을 치는 모양인데, 자주 한국에 오면 서점에서 책을 읽다가 시간을 다보내곤 한다는 얘기에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무척 행복하였다.
더구나 담임을 하던 시절에 내가 쓴 동화를 들려주었던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땅벌] 이야기를 할 때에는 40여년의 세월이 완전히 되감겨 버리는 것 같았다.
내가 사는 곳을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다 보니, 이곳이 이모 댁이 있어서 자주 들었던 마을이라서 그 무렵의 동네모습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33년 전에 내가 바로 이 집터에 발을 들여 놓았었는데,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재개발이 되기 전의 문화촌 아파트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40여 년 전의 이야기를 하는데 함께 다녔던 것처럼 같은 지역에 연고가 있어서 함께 나눌 이야기가 있고, 그 오랜 옛날의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같이 있는 것처럼 같은 생각을 나눌 수 있었으니, 나는 잠시나마 75년으로 돌아가서 지난날의 풍경 속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꽃가꾸기를 잘 하였던 것도 기억하고 있어서, “이곳 뉴질랜드에 오셔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많은 꽃들이 피어나거든요.”하면서 꽃을 보면 나의 꽃가꾸던 모습을 생각하곤 하였다는 것이 너무 고맙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잊지 않고 기억하여준 제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이 되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42년 교직을 정년퇴임 하면서 한 말 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던진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상처 받고 잊지 못해 할 아이들이 이제는 더 생기지 않게 되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라고 얘기하면서 진심으로 많은 아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을 나도 모르게 했을 것인데 모두들 용서하여 달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1975년 학교 일에 매달려서 가끔은 수업 시간에 호출이 되어서 자습을 시켜두고 나가기도 하였고, 수업을 하다가 함께 나가서 작업을 시키기도 하였던 날들이었는데, 얼마나 원망을 할 일들이 많았을 것인데 그래도 즐거운 추억만을 가지고 연락을 해준 제자 이광자 여사 덕분에 오늘 하루는 참으로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였다.
멀리 지구 반대쪽 타국에서 전화를 해준 이광자여사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에서 행복에 겨운 이야기를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