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임 이틀째에 받은 뇌물

2013.02.25 10:03:00


1964년 3월 15일 . 나는 발령장을 받아가지고 전남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에 새로 개교하는 신호분교에 발령을 받아 부임을 하였다.

마을 앞의 약간 둔덕진 논바닥에 덜렁하게 교실 네 칸이 있었고, 교실 앞에는 국기 게양대가 하나 서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논바닥이었다. 운동장 한 구석에는 화장실 대용으로 논바닥을 파고 산에서 베어온 나무를 엮어서 벽을 바르고 초가로 지붕을 이은 두 칸짜리 화장실이 볏짚으로 짠 가마니를 문 대신으로 달아 두었고, 남자용은 아예 둘둘 말아서 위로 잡아매어 놓은 엉성한 모습으로 덩그렇게 서 있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벼 그루터기가 아직 다 사라지지도 않은 논바닥을 운동장이라고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발령장을 들고 들어서니 60도 넘으신 분교장<분교의 책임자>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마침 선생님들께서 수업이 끝나고 아직도 차가운 날씨에 4칸 교실 중에서 두 번째 교실의 복도를 베니어판으로 사람의 키 높이보다 약간 높은 정도로 막아서 만든 임시 교무실에서 난로 하나를 두고 둘러 앉아 계셨다. 분교장 선생님을 비롯하여 나이 60이 다되신 노선배님과 30대 후반의 젊은 선생님이 두 분, 그리고 우리와 가장 나이가 비슷한 30이 채 안된 선생님이 한 분 그렇게 다섯 분이 계셨고, 새로 발령을 받은 나와 광주사범 출신의 선생님이 함께 부임을 하였다. 인사를 올리고 나서 선배선생님들과 앉아서 학급 배치를 받았는데 나에게는 1학년을 담임하라고 하셨다. 사실 첫 발령에 1학년 담임이라니 조금 힘들 것 같기는 하였지만, 일단 배정을 받았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1학년 입학 서류를 받아가지고 출석부를 작성하여 둔 것과 비교를 하면서 어떤 아이들인지 알아보고 있는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시는 선배님은 두 번째로 나이가 많으신 분이셨다.

“김선생, 어려운 부탁하나 해도 될까?”
“예, 선배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자네가 1학년을 맞았고 나더러 2학년을 하라고 하는데, 사실은 지금까지 내가 1학년을 맡아서 하고 있었단 말일세. 그런데 이제 2학년을 맡으라고 하니 무슨 짓인지 모르겠네. 그래서 내가 1학년을 할 테니 자네가 2학년을 맡아주면 안될까?”

“아니 뭐 그렇게 해도 된다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아이들에게 인사도 안 했고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필요하시다면 바꾸어 맡아도 관계없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분교장한테 이야기 하겠네.“

잠시 후에 분교장과 셋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서 나는 몇 시간 만에 2학년 담임으로 변경이 되었다. 이튿날<3월16일> 아침, 우리 두 사람은 학생들 앞에서 새로 부임한 인사를 하였다. 구령대도 없어서 그냥 맨 바닥에 서서 아이들은 벼포기에 맞추어서 서 있으니 벼논 같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교사로서의 첫발을 디딘 나는 아이들과 함께 교실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교실 4칸에 7학급이나 되는 아이들이 있으니,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서 수업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내가 맡을 아이들은 등교조차 않은 상태이었다. 4학년은 오후 수업이 있으니까 교실 하나를 쓰고 1, 2, 3학년은 두 반이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수업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점심때가 거의 된 12시부터 아이들은 수업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내가 맡은 반<2학년 2반>의 아이들은 56명이나 되었지만, 오후반이라서 첫시간 공부가 끝난 다음에 오는 아이도 있었다. 농촌에서 부모님은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나가시고 저희들끼리 놀다가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학교 시간에 늦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교실에 들어가서 선배 선생님 데리고 들어가서 소개를 해주시고 나서 내가 맡을 아이들과 첫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과 함께 1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된 김선태 선생님입니다.”하고서 칠판에 이름을 써주려고 백묵<분필>을 집어 들고 쓰려는데 칠판이 엉망진창으로 낙서도 있고 깨끗하게 지워지지도 않았다. 칠판지우개를 들고 칠판을 닦으려는데 지우개가 다 닳아서 터져 가지고 속에 넣은 솜뭉치가 삐져나와서 너덜너덜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없이 손가락으로 솜뭉치를 밀어 넣어서 간신히 칠판을 닦고 나서 내 이름을 써주었다.

이렇게 시작한 공부시간은 4시간을 마치고 나면 오후 3시 반쯤에 끝이 났고 청소를 함께 하고 나서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오후 5시가 거의 되어 버렸다. 그 동안 아이들에게 제대로 담임도 없고 교실도 두 반이 같이 쓰는 관계로 엄청 더럽혀져 있어서 아이들이 간 뒤에도 내가 다시 정리를 하고 창틀의 먼지를 닦아내고 하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갔다.

오후에 간단하게 주막집에서 환영회라나 하는 것을 하는데 고막 한 양푼에 막걸리와 소주병이 들어 왔고, 생선 조림이 한 냄비 올라왔다.

“두 김선생님 이제 고흥에 발령을 받았으니 꼬막<고막> 한 가마니씩은 먹어야 여기를 떠나시게 될 것이오.”하시는 말씀은 이 고장이 지금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벌교고막이 생산이 되는 여자만의 입구부근이기 때문에 고막이 많이 나오는 곳이어서 하시는 말씀이었지만, 거의 매 끼니마다 고막이 반찬으로 등장을 하는 곳이었다. 우선 숙소도 마련이 되지 않았고, 어디 갈 곳도 없으니까 학교 교실에서 10m 밖에 안 되는 학교 뒤에 있는 주막집에서 먹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아이들이 학교에 오기 전에 나는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첫 새벽에 학교 운동장에 가서 혼자서 간단히 체조도 하고 돌아다니면서 마을 구경도 하였다.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오전 내내 이웃교실에서 수업을 하시는 선배님들의 수업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무료하게 보내고 있다가, 이른 점심을 먹고 수업이 시작 되었다.

교실에 들어가서 출석을 부르고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쪼르르 여자 아이 하나가 나오더니 뒤에 숨겨가지고 나온 것을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뭐니?“

종이에 싼 것을 풀러보니 그것은 손으로 만든 칠판닦이이었다. 옛날 어린 시절에 유리창을 닦을 때에 만들어 가지고 다니던 모양의 손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끈을 달고 손바닥만 한 넓이의 닦는 면은 그 무렵에 유행하던 골덴이라는 천으로 만들고 속에는 헝겊들을 뺑뺑하게 넣어서 만든 것이었다. 그것도 한 쌍으로 양쪽에 두고 쓸 수 있게 만들어 온 것이다.

“아니, 이걸 어떻게 만들어 왔어?”
“어제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밀어 넣어서 칠판을 닦으신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어요.”
“그래? 정말 고맙구나. 감사하게 잘 쓰겠다고 말씀 드려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한아이가 역시 칠판닦이를 손에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역시 비슷한 모양이지만 천이 달랐다. 나는 두 아이를 앞에 세우고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발령을 받아서 두 번째 출근 날에 받은 나의 생애 첫 뇌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작은 선물을 평생 잊지 않고 5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그날 그 어린아이들의 고마운 행동, 그 작은 선물을 잊을 수가 없다.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제 겨우 2학년인 아이들이 부모님께 얘기를 하여서 만들어 달라고 졸라 만들어 오는 그렇게도 영리하고 재치 있던 아이들이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보고도 싶어진다.
김선태 한국아동문학회 회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노년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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