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진미를 맛보다

2013.04.17 13:52:00



오전 내내 달려서 장흥읍에 닿은 시간은 12시 20분경이었다. 예정보다 50여분이나 늦어져서 행사를 바꾸어 진행하는 방법으로 처리가 됐다. 본래는 환영식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너무 늦어져서 먼저 점심을 먹고 나서 환영행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했다. 점심시간이어서 군청에서 행사를 하기도 어렵고, 식당에서는 이미 식사준비가 돼 있는데 너무 기다리면 식사가 맛이 없어지는 등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바로 식사를 하고 다음 행사를 진행하기로 하고 차를 댄 곳은 장흥시장 옆의 주차장이었다. 곧장 안내가 돼 들어간 곳은 '명희네 장흥 삽합집'이었다. 이곳 장흥 장터에는 이런 정육점 식당이 20여 곳이나 된다고 한다. 이곳에 이런 정육점 식당이 자리 잡게 된 것은 이 고장에서만 생산이 되는 한우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 고장 장흥에서는 인구 4만2000여명이 5만여 마리의 소를 기르고 있어서 인구보다 소가 더 많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 한우가 군청과 농업센터 등에서 조작적으로 지도 육성하는 친환경 사육으로 전국에서 1등급 소의 생산율이 가장 높은 고장이기 때문이란다. 이런 1등급 소를 생산하게 된 것은 이 고장 장흥에서는 소의 사료의 약 80% 이상을 사료작물로 가꾼 사료작물인 호밀 등을 심어서 해결을 하기 때문에 다른 고장의 한우와는 우선 사료부터 다르다고 한다.

이렇게 풀을 먹고 자란 한우이기에 늘 1등급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런 한우를 도살, 직송한 뒤 고기를 부위별로 포장해 두고, 자신이 먹고 싶은 부위를 골라서 사가지고 식당에 들어가서 구어 먹기 위해서 필요한 불판이나 채소 양념들을 제공하는 식당이라서 결코 속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정육점 식당이 전국 곳곳에 있지만 이렇게 직접 고장에서 기른 소를 도살해서 이곳에서만 소비하는 그런 형태이기에 늘 많은 손님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본래 이 고장의 맛의 자랑인 장흥삼합이란 장흥에서 생산되는 식품재료로 만든 것으로 장흥삼합(장흥한우+ 키조개 + 표고버섯) 인데 우리는 이집에서 색다른 이고장의 생산품인 바지락을 먹게 됐다. 여자만 또는 득량만이라 불리는 이 장흥과 고흥반도 사이의 바다는 세계해양기구에서 인정하는 청정바다라서 이 고장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은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이지만 우리들이 이 청정바다의 바지락회무침을 먹게 된 것이다. '1박2일'이라는 TV프로그램에도 소개 된 곳이라서 꽤나 유명한 집이었다.

우리의 식사는 한우불고기가 아니라, 바지락 회무침으로 준비가 됐다. 바지락과 새조개가 함께 섞여서 씹히는 맛이 있고, 푸짐한 바지락 회는 4명분을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수북하게 내어 나왔다. 물론 우리들의 상에 나온 음식들이나 반찬들이 모두 다 남도 음식답게 푸짐하고 종류도 다양하면서 맛도 좋아서 모두들 “역시 남도 음식이야!“를 연발하면서 밥그릇을 싹싹 비워내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곳 장흥이 낯선 고장은 결코 아니다. 아니 어쩜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대한제국시대에 오위장(五衛長)을 지내시던 고조부님께서 신식군대를 만들면서 구식군대를 해산하자 직위를 잃고 계시다가 신식군대와의 차별 때문에 일어난 ‘임오군란’ 때에 구식군대의 대표이자 지휘자 이었던 분으로 자연스럽게 참여하여 대원군에게 직소를 하는 등 구식군대의 주장을 대신전하는 역할을 하다가 결국은 일본영사관을 공격한 주동자로 몰려서 쫓기는 신세가 되셨고, 한양에서 숨어 지낼 수가 없어지시자, 태어난 지 100일도 지나지 않은 할아버지를 품에 안고 멀리 정남진까지 엄동설한 정초의 길을 걸어서 피신을 했던 고장이다.

이때가 1884년 1월초이었다. 이렇게 이곳에 정착하신지 15년째인 1900년에 일본군의 밀정은 결국 고조할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고변을 하게 됐고, 일본군에게 끌려가신 고조부님(절충장군 오위장)과 증조부님(통훈사헌부 감찰)은 목숨을 잃으셨고, 18세의 할아버지께서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움집을 짓고 산을 개간하여서 부를 이루시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 고장에서 동학운동의 최후 저항자들이 처형을 당하는 모습을 본 할아버지께서는 이곳이 살기 어려운 고장이라고 생각하여서 보성으로 식솔을 이끌고 떠나신고 말았으니 이 고장으로 피신을 하신지 50여년 만이었다.

그 후 내가 보성에서 태어났고, 자라서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약 4년간 이 고장 유치면 송정리 공수평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모가와 이모가가 관산, 용산, 부신면에 사셨기에 자주 다니러 오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장흥은 낯설지 않은 곳이지만 이번 여행지는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기도 하지만, 실로 30여년만 '1979년 경기도 전입으로 전남을 떠남'에 찾아온 셈이니 이제는 아주 낯설기만 했다.

그래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옛 지명은 알만하고 옛 흔적을 보면 반갑기만 하였다. 점심을 먹고 탐진강 변에서 잠시 쉬면서 동학란의 마지막 장수들이 이곳에서 참살을 당하였던 모습을 들은 대로 전했다. “일본 놈들은 동학 접주를 비롯한 여남은 명을 잡아다가 저 강변에다가 나무 말뚝을 박고, 그 말뚝에 생채로 잡아 묶은 다음에 우지뱅이-집단의 위를 묶고 아래를 풀어서 삿갓모양으로 만들어서 물건을 덮어 비를 막던 짚풀 기구-를 씌운 다음에 산 사람이 있는 우지뱅이에 불을 붙여서 태웠는데, 불이 붙자 죽어가면서 지르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만큼 처량했고, 마지막에는 불에 타서 머리통이 폭발을 하면서 골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몇 달 동안이나 밥을 먹지 못할 만큼 지독한 모습을 보였던 곳이었다”고 전하자 모두들 일본의 극악함에 치를 떨었다. 이 고장의 역사의 한 토막이 될 이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다시 들을 수 있을는지 모르고, 또 다시 전해지는 곳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선태 한국아동문학회 회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노년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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