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에 발을 딛고 살아온 세월을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에서 찾아볼까? 아니면 이역 저역을 찾아다니는 전철의 걸음에 비유해야 할까? 아니다. 세월은 그래도 내 마음 속에서 겉으로 스며나오는 손위에 검은 세포 자국이 말해 준다. 곱기만 한 어린 고사리 같은 손이 거칠은 세사에 얼굴 가리면서 자신을 묵묵히 가꾸어 온 긴 여정에서 하나씩 만들어 온 속인의 세포 사리에서 세월의 흐름은 또렷하게 보여진다. 스님만이 사리를 남기는 것은 아니다. 속인도 세사의 모든 응어리를 한 줌의 자국으로 손등 위에 얼굴에 한 점의 포인트를 만들어 사리인 양 보여주는 것이다.
공직자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오늘도 내일도 같은 업무를 반복하게 된다. 그런 속에서 단조로움에 지쳐 스트레스성 피로를 가중치로 받아들여질 때가 있다. 특히 교직에 머물고 있는 교사는 어린 학생들을 교실에 남기고 먼저 귀가하기가 쉽지 않다.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다 보니 모두들 잠들어 있는 야밤에 야근을 하러 가는 사람인 양 느껴질 때도 많다. 저녁 10시에 학교를 출발하여 집에 도착하면 거의 밤 11시가 된다. 좀 휴식을 취하다 보면 어느 듯 밤 12시. 식구들과 대화의 시간은 거의 찾을 수 없이 흘러간다. 그래도 다정한 아내는 밤늦게 고생하는 남편이라고 따뜻하게 대하는 면이 있으려만 매일같이 늦게 귀가하는 남편에게는 아예 문을 열고도 쳐다보지도 않을 때가 많다고 한다. 아내는 말한다. 누구를 위한 학교냐고? 왜 남들처럼 하지 않고 혼자서 많은 일을 하느냐고? 참으로 말 대꾸를 할 수도 없다. 학교 현장은 엄연히 학생들이 책상 앞에 있는데 누가 이들을 지켜 주어야 하는 지.
만성적인 교사의 피로를 덜어주는 쉼터는 어디일까? "선생님" 불러주는 그 소리가 다정해서 가려다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책상 앞에서 쉼터를 찾는다. 그러나 다시 찾아오는 교사의 만성피로. 수업을 마치고 교실에 앉아 학생들을 보고 있는 즐거움 속에서도 피로는 눈썹 위에 걸려 있다. 똑같은 시간에 집에 있으면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훨씬 덜 피로한 것도 직업이 주는 스트레스는 알게 모르게 직업인은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느 늦은 시간이 아닌 때 귀가를 하면 마치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이방인 양 느껴지는 자신을 의아스럽게 생각할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모처럼 한 번은 학교에서 일찍 나가고 싶었다. 피로에 지치고 심신이 피로했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박차고 나가 인천 아라뱃길 신천교 아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지난날의 상념이 잔잔한 강물의 파도에 밀려 나의 곁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삶이란 잔물결의 여울일까? 생각도 해 보았다. 파도가 거세게 몰아칠 때는 파도의 성격이 난폭하다는 것만 알게 된다. 그러나 잔잔한 물결을 몰아오는 산들바람과 더불어 파도를 만나면 거센 파도는 순둥이처럼 부드러워진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같다. 학생들이 아무리 거칠다고 하나 학생의 거친 면 이면에는 잔물결과 같은 부드러운 순둥이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마음이 어느 때는 나를 감동시킬 때가 있다. 여기서 교사는 쉼터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