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승이라는 말을 버리고 싶지 않다. 우리 사회가 스승이라는 단어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도 나는 그 쓰레기통에서 구겨진 단어를 펼쳐보면서 새롭게 솟아나게 하고 싶다. 주어진 길을 나 스스로 지키지 못해 타인이 쓰레기통에 갖다버리도록 한 자신을 책망하면서 나는 그 쓰레기통에서 끄집어내어 명경지수로 더 깨끗하게 정제해 보련다. 울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더러운 그 눈물이 다 쏟아지도록. 나는 더 크게 울면서. 몸부림쳐 보련다. 한 권의 책을 들고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주어진 높은 단어이자 뭇 사람의 시선이 모아져 우리 사회의 언어 중의 언어인 ‘스승’이란 말을 진정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입에서 소리도 없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스스로 쏟아내게 하고 싶다. 아침을 식구들과 같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학교에 출근하고, 주말이면 가족들과 더불어 나들이 제대로 가지 못한 시절이 얼마이던가? 학교에서 학생들과 책과 씨름하면서 보낸 숫한 세월 속에서 얻은 것이 스승이란 단어도 버리고, 이제는 교사라는 단어조차도 내 팽개치는 그런 교실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가르침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학생은 교실에서 피로해서 잠을 자고, 교사는 잠을 자는 학생 앞에서 목청이 떠나갈 듯이 외쳐대는 수업이 과연 온전한 수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업종이 울려도, 아니 수업 예비종이 울려도 학생들은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면서 교사가 교무실에서 나와 소리치면 그때서야 화장실에 가고 복도의 컴퓨터에서 자리를 뜨는 비효율적인 학교풍토의 수업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아니 어느 한 학교의 일이라고 치부할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보는 교사의 눈에는 눈물이 난다.
수업종이 울리기 전 예비종이 울리면 학생이 교실에 들어가 수업 준비를 하고 조용히 선생님을 기다리던 과거의 학생들의 모습이 왜 자꾸만 떠오르는 것일까? 과거의 선생님이 호랑이처럼 무서워서일까? 아니면 학생의 준비태도가 잘 된 인성 때문일까? 한 시간 수업을 시작하면서 교사가 학생에게 수업을 하는 과정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까? 산만한 학생 자리바꾸어 앉히기, 뒤에 나가서 서서 공부하기, 한 학생에게 질문을 집중적으로 퍼부어 잠 깨우기 등등 참으로 많은 수업기술요소들이 교사에게는 필요하게 된다. 천차만별한 학생들의 능력을 맞춤식으로 전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올바른 수업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교사의 정신집중이 요구된다. 수업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학생이 한 시간 동안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은 학생 자신에게는 질곡이나 다름없다. 이를 지도하는 교사 또한 김빠진 수업분위기가 도미노처럼 확산됨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수업을 전개하기도 한다. 옆 친구가 자면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그런 미래지향적인 학생만 있으면 수업이 오죽 좋으랴? 교사가 잠자는 학생에게 싫은 소리로 잠을 깨웠다고 교사에게 비속어를 사용해 인터넷에서 핫이슈가 되고 상급기관에 투서를 올려 교사가 비속어로 자신을 지도했다는 등등 참으로 웃지 못 할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다. 웃으면서 흥미있는 수업을 하자고 수없이 되뇌는 요즘 참다우면서 흥미있는 수업기술이 봇물 터지듯 인터넷을 장식하고 있다. 흥미중심의 지도. 참으로 좋은 이야기다. 흥미있는 수업이 되기 위해서는 학생의 수준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교사의 수업이 음악의 리듬처럼 높고 낮은 톤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같은 반에서 다양한 수준의 학생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배우의 가식연기를 배울 필요도 있고, 교사 자신만의 수업 노하우도 기를 필요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학생이 교사의 수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1차적으로 충족되지 않는 한, 교사의 바른 수업도 흥미중심의 수업도 교사에겐 한의 눈물만 만들어 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