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그리움

2016.05.23 09:03:00

철쭉꽃 지는 언덕 진종일 뻐꾸기 소리 오월이 가고 있다. 피천득은 오월을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의 청신한 얼굴이며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라 했다. 그리고 오월은 앵두와 모란의 달로 신록의 전나무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했다.

구우~구꾸구, 진종일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담장을 넘어 드는 아카시아 향기와 빨간 장미의 유혹에 이끌려 무지개로 떠 있는 가슴속 봄 그리움을 찾아 이년만의 남해읍 둘레길을 나선다.

봄이 한창 짙어지고 있다. 지난 사월 밀물처럼 몰려와 가슴을 뒤흔들었던 진달래 앵두 벚꽃은 진지 오래고 꽃 진자리 숲길엔 오동나무 등나무의 은은하고 우아한 보랏빛 꽃들이 조롱조롱 오월의 등불을 달고 있다.

오월의 하루 모습! 사랑스럽다 보드랍다 예쁘다. 오랫동안 시력을 갖지 못했던 사람이 각막 이식수술을 통하여 처음으로 빛과 마주했을 때 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멀리 보이는 푸른 초장의 숲은 어머니의 벨벳 치맛자락 같아 마구 비비고 싶다. 오월의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의 물결은 청보리밭을 스쳐 지나는 실루엣 같다.

하늘을 본다. 태양은 정열을 퍼붓고 그 빛을 담은 장미는 그리움에 지쳐 가시를 품어 빨간 고개를 내민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파르르 떨어지는 꽃잎은 사랑을 못 이뤄 눈시울 적시는 시가 된다.

오월! 언제나 가슴에 품고 싶은 계절이다. 내 언어의 표현이 한계가 있음이 더 안타까워짐이 이때다. 청자 빛 하늘이 파고드는 오월 하루! 끝내 열지 못한 그리움은 모란꽃처럼 뚝뚝 떨어진다.

거울 같은 무논을 끼고 쉬엄쉬엄 내디딘 발걸음이 멈춰선 곳은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오동 마을이다. 자운영 꽃이 점령한 다랑논 귀퉁이에 준비한 모판의 모가 웃자라 보인다. 여름의 신호등을 가진 건널목 간수가 유월을 흔들고 있다.

봄 햇살이 너무 강하다. 이마에 손 그늘을 드리운다. 오월의 풋풋한 젊음이 싱그럽다. 구김살 없는 햇볕이 물오른 수목에 싱싱한 사랑을 아낌없이 축복해 준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무거워 온다. 밭이랑에 햇살이 쪼개어지고 언덕배기에 핀 철쭉은 외로운 화려함을 쏟아낸다. 사랑이 그리웠지만 끝내 이루지 못해 까만 반점의 상처를 문신으로 새기고 져가는 분홍빛 화려함이 철쭉의 운명이다. 벌과 나비는 찾지 않는다.

그동안 너무 욕심에 매여 살았다.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렸지 뒤도 옆도 돌아보는 일에 소홀했다. 그런 사이 두 번이나 오월의 봄 합창을 귀 기울여 듣지 못했다. 오월의 여신에 사죄해야겠다.

두어 번 걸음을 멈춘 뒤에 오동 계곡 초입에 도착한다.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어린 날 기억을 반추하여 찔레 순을 꺾는다. 선택이 잘못되었을까? 연한 순이 아니어서 가시에 찔렸다. 붉은 핏방울이 떨어진다. 하얀 찔레꽃 가시에 찔렸으면 하얀 피가 흐를 줄 알았는데! 꿈에서 깨어난다.

오월! 이는 꿈이면서도 현실이다. 한 줄기 바람이 산허리를 감싸며 내달린다. 미나리아재비의 노란 꽃이 흔들린다. 누가 그랬다 미나리아재비 풀엔 독이 있어 토끼에게 먹이면 죽는다고. 발길을 돌린다. 저수지 둑 아래서 올려다본 잔디 꽃들이 할아버지 긴 수염처럼 파란 하늘에 세월을 스케치한다.

내가 딛고 사는 오월의 땅과 하루. 바쁘다는 핑계를 하지만 모두가 살아야 한다는 사력을 다해 살아가는 날이다. 발 디딘 곳마다 삶의 무늬가 사방연속무늬로 새겨져 있다. 이 오월에 나는 무슨 무늬를 그리고 있는가?

늦은 오월 하루 해거름 훈풍이 볼과 귀를 스쳐 간다. 두 손을 모은다. ‘욕심 때문에 잃었던 시력을 찾아 빛을 향해 감사에 눈뜨는 하루하루가 되게 해 주소서. 보드라운 감사와 따뜻한 고마움을 신록을 벗 삼아 뜨개질하게 해 주소서.’

오월 하루! 그 시간은 언제나 머무는 듯 지나간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를 늦은 오월 저녁 나직이 읊조려본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중 단 며칠만의 주는 신록의 찬란한 행복. 그 오월이 있어 또 다른 해 오월을 기다리는 행복으로 감사한다.

이제 오월도 하순이다. 한 낮 태양의 열기는 유월의 냄새를 피워 올린다. 마늘 대궁은 누렇게 변한다. 유월이 되면 이 산하는 원숙한 여인 같은 녹음으로 뒤덮여 신록의 그리움은 실핏줄 속에서 긴 동면에 들어갈 것이다. 오월은 신이 내게 준 베일로 가려놓은 가장 큰 축복이다.
장현재 경남 상주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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