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를 보고 나서
방송에서 예고편을 접했을 때 이 영화는 꼭 봐야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라는 특별한 관계를 차치하고라도 윤동주라는 한 시인에 대한 깊은 연민이 나를 자연스럽게 극장으로 이끌었다. 극장엔 나를 포함해 30여 명의 관람객이 있었다. 조조 영화인데도 비교적 많은 관객이 찬 것은 조용히 입소문을 타면서 많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았다.
영화는 윤동주가 일본 고등계 형사 앞에서 취조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일본 경찰이 ‘재교토조선인학생민족주의(在京都朝鮮人學生民族主義)그룹사건(事件)’에 연루된 혐의로 윤동주를 체포한 것이다. 5개월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검사국으로 넘겨진 피의자는 세 명이었다.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당시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 재학생이었고, 윤동주는 도오시샤(同志社)대학 재학생이었으며, 고희욱은 제3고등학교(대학 예과에 해당하는 교과과정) 재학생이었다.
당시의 취조문서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중심인물인 송몽규는…’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송몽규가 사건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송몽규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으로 그의 부친 송창희 선생이 명동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1917년 9 월에 윤동주의 생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윤동주의 큰고모와 결혼해 처가살이를 하고 있을 때 장남 송몽규가 태어난 것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에서 6년, 대랍자 현립 중국 소학교에서 1년, 은진중학교에서 3년 동안 같이 공부했다. 1935년 연초에 당시 은진중학교 3학년으로 18세였던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부문에 당선됐다.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3개월 후 갑자기 가출하여 난징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에 들어가 그곳에서 군사훈련을 받는다. 몽규의 적극성을 부러워하던 동주 또한 신사참배 강요를 이유로 숭실중학교를 자퇴한다. 자퇴 후 고향에 내려와 조선어를 배우며 자긍심을 키우거나 여름방학을 이용해 동생들에게 태극기, 애국가, 기미독립만세, 광주 학생 사건 등을 이야기해 주며 저항정신을 드러내는데 주로 행동보다는 시를 통해 표현했다. ‘유언’이란 시에는 당시 동주의 마음과 시대상이 잘 드러나 있다.
후어-ㄴ한 방에
유언은 소리 없는 입놀림.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
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
이 밤에사 돌아오나 내다봐라---
평생 외롭든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집에 개가 짖고
휘황 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영화를 보면 동주는 적극적인 행동파였던 몽규와는 뜻이 달라 항상 갈등을 겪는다. 반면 정병욱과는 마음속의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서울 연희전문학교 3학년 때 만난 후배 정병욱은 다섯 살이나 어렸지만 이미 시인으로 등단한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동주는 존경의 의미로 ‘형’이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붙였고 병욱 또한 동주를 잘 따랐다. 둘은 일요일이면 교회를 가고 그 외의 날에는 충무로 책방거리, 인왕산 중턱 등을 함께 걸으며 깊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비록 넉 달이었지만 김송 시인의 집에서 하숙을 같이하기도 했다. 그해 동주는 시집 출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쓴 그 시집의 서문이 바로 그 유명한 ‘서시(序詩)’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가편집본을 미리 이양하 선생에게 보여주자 일본 검열에 걸릴 작품이 많다는 선생의 말을 듣고 친필 원고를 이양하 선생과 정병욱에게 각각 한 부씩 건네고 일본유학을 떠난다. 정식으로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대는 동주에게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잘 나가던 친구들과 달리 동주에게는 주옥같은 시들을 발표할 지면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동주의 고민은 어쩌면 열등감과 식민지 지식인의 고민이 복합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같은 실망감이 동주를 쫓기듯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한다. 하지만 일본에 가기 위해선 반드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동주로서는 참기 힘든 치욕이었다. 이때의 부끄러움을 기록한 시가 바로 참회록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도쿄 입교대학에서 1학기를 수강한 후 교토도시샤대학으로 편입한 동주는 당시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던 송몽규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그리고 이듬해 동주와 몽규는 독립운동 혐의로 교토 경찰서에 검거된다. 그로부터 2년 후 동주와 몽규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해방을 불과 두어 달 앞둔 1945년 당시 그들의 나이는 29세였다.
정병욱은 동주가 유학을 떠난 후 강제 학병으로 징발되는 바람에 모교를 떠나야 했는데 그 와중에 동주의 시집을 어머니에게 맡기며 이렇게 당부했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수해 주십시오.” 이 같은 병욱의 지혜로 우리는 지금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동주 자신과 이양하 선생이 가지고 있던 시집은 지금은 온데간데없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동주, 몽규, 병욱이 지녔던 진한 우정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원통하게도 후쿠오카감옥에서 참혹하게 사라졌으나 그들의 죽음마저 일제 강점기의 암흑을 물리치는 큰 횃불들이 되었으니 우리민족의 홍복인 셈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든 생각은 평소 윤동주에 관한 전문 지식이 없는 관객들도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보면서 일제 강점기의 삶과 윤동주의 시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영화라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한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특히 그동안 자세히 몰랐던 송몽규에 대한 발굴은 이 영화의 큰 소득이라는 생각이다.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을 비롯해서 남녀노소 없이 영화 ‘동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유와 꿈, 그리고 독립된 자기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