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하게 해석되는 가족의 의미
작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필자의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을 보니 '가족'의 역할이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있어, 언젠가 집에 놀러온 아이 친구들을 보고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흰 종이 한 장씩을 주면서 물어본 적이 있다. "얘들아 가족 하면 생각나는 거 뭐야? 그림으로 그려볼래?" 초등학교 초년생에게는 사뭇 추상적이고도 어려운 질문이겠으나, 사실 그 아이들 대부분은 형태가 달라도 여하튼 가족생활을 하고 있으니 생각나는 것이 많았는지,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친구들 종이를 힐끗거리기도 하면서 아이들은 종이를 되돌려주었다. 거기에는 가족과 함께 밥 먹는 그림 그리고 함께 여행 간 그림이 단연코 많았다.
어린 아이들에게 가족이란, 함께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즐거운 여가시간을 보내는 친밀한 집단인가보다 정도로 결론이 났다. 얼마 전 새 학기가 시작되고 늘 그랬듯이, 강의를 수강하는 전공, 비전공의 학생들에게 '가족' 하면 생각나는 게 뭐냐고 물었다. 초등학생들과는 달리 사랑, 신뢰, 위로,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기, 관계의 지속성 등이 강조되는 것을 보면 청년들에게 가족은 사뭇 정서적 관계 맺음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을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성별에 따라, 연령에 따라, 결혼여부에 따라 공통점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최근 들어 가족과 관련된 언론의 보도나 통계, 실태조사, 의식조사 등을 보면 가족에 뭔가 큰 변화가 있는 것이 확실하고 그래서 더더욱 사람들은 가족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 든 어르신들에게 가족은 아들, 딸, 사위, 며느리를 포함하지만, 막상 사위나 며느리는 장인, 장모 혹은 시부모를 가족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 호적상, 주민등록상 가족에 대한 규정은 내가 생각하는 가족과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가족은 우리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에게 너무나 가깝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이면서 또 들여다볼수록 어렵고 한마디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그래서 매우 어려운 주제라는 것이 연구자로서 필자가 늘 하는 생각이다.
가족은 단지 변화 과정에 있을 뿐
가족의 모습이 다양해진 것은 많은 요소들과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이면서 동시에 과정이겠으나, 그 중 가치관의 변화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젊은 사람들은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긴다니 대부분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가족의 구조나 모습, 관계 등에 대한 생각도 어느 하나의 전형으로 회귀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최근 들어, 혈연과 혼인·입양의 관계를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개념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된다. 결혼을 했나, 누가 낳았나를 기준으로 가족을 규정하기보다, '누구와 어떻게 사는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가족개념을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주장도 있다.
이제 2008년도부터 새롭게 시행되는 신분제는 기존의 호주제 중심의 가족제도를 대폭 손질 보완하여, 자녀를 낳으면 경우에 따라 엄마 성(姓)을 줄 수도 있고, 엄마의 재혼과 함께 그 자녀는 새 아빠의 성(姓)으로 바꿀 수도 있으며, 함께 사는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가족과 친족의 범주를 구별하는 등의 내용들이 검토되고 있다하니 가족의 개념도 많이 바뀔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다양해지는 형태의 가족을 보고 있으면, 상당히 가족이 취약해지고 불안정성이 증대되며 그래서 가족의 의미나 가치 그리고 중요성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하려 하고, 아이도 안 낳거나 적게 낳으려 하며, 이혼은 더 많이 하니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변화 과정에 있을 뿐, 지속적으로 '구성-해체-재구성'을 반복해 가며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삶에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별히 살벌한 경쟁, 살아남기 위한 스트레스가 심한 이 시대에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 구성원 간 사랑과 신뢰를 주고받으며 여가를 함께 즐기고 휴식과 안정을 제공하는 정서적·관계적 역할의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더 부각되는 공동체이며 생활단위라는 데에도 의문의 여지는 없다. 점차적으로 서구에서도 또 우리나라도 '사랑'이라는 정서, 관계에서의 책임감 등이 중시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의 달에 가족을 다시 생각하며 우리가 짚어보아야 하는 것은, 이처럼 형태의 다양성을 보이는 가족을 우리 사회가 인식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얼마나 수용하고 있는가이다.
어쩌면 실제 삶에서 가족은 다양해지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선 줄곧 '엄마, 아빠와 그들이 낳은 아들, 딸로 이루어진 가족'을 정상가족, 전형적 가족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증가추세를 보이는 '그렇지 않은' 가족의 구성원들은 이 사회에서 비정상적이고도 이상한 일탈가족으로 낙인찍히게 되지 않을까에 대해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엄마, 아빠 중 하나는 없거나, 성이 다른 아빠 혹 형제자매와 살거나 하는 경우는 계속 증가해왔고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이다.
우리의 생각 바꾸기가 필요한 때
일하는 엄마도 계속 증가 추세이다. 그런데 각급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생활조사, 숙제와 준비물, 학교행사 등은 '낳아준 엄마아빠와 산다', '집에는 엄마가 있다'는 전제 하에 출발한다. 여성의 취업률이 50%를 넘어간다 하는데도 중·고등학교 시험 감독에 학부모가 참여하기도 하고, 초등학교 저학년 배식이나 청소, 환경미화도 상당한 부분 부모, 그 중에서도 엄마의 손에 의존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은 교육현장에 남아있는 '관행'이기도 하다. 그것이 100% 자발성과 자율성에 기초한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마는, 그것이 아닐 경우에, 게다가 그 과정에서 학교활동의 참여자와 비참여자 간의 갈등이 싹튼다면 이러한 관행을 계속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오랫동안 주부 상담을 해 온 필자는 이와 관련한 취업주부들의 심리적 갈등과 소외감, 다른 학부모들에 대한 미안함 등에 대해서 많이 들었다. 엄마는 취업하고 아빠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어떤 가정에서 초등학생 자녀 점심 배식에 참여해야 하는데 시간 내기가 자유로운 아빠가 갔더니, 다른 엄마들이 불편해하고 아이들도 웃고 해당 자녀는 얼굴 빨개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난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몇 번 더 아빠가 참여했더니 힘 센 아빠가 무거운 것도 잘 들고 청소도 빨리 잘 해서 다른 엄마들이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한참 후에 들었다. 사실 생각만 조금 바꾸면 되는 일인데 생각바꾸기는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다.
양성평등의 관점이 부각되는 이 시대에 가족과 관련된 일을 여성, 엄마, 주부에게만 부담지우는 일은 상당한 낙후와 지체의 표현이다. 가족은 양성 간, 세대 간 평등과 민주적 관계를 배우는 경험의 장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자녀들은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배운다. 아빠는 앞치마 두르고 부엌에 서 있고 엄마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그림이 교과서에 등장한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어떻게 우리 자녀들이 ‘평등’이라는 가치를 제대로 배우고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
해마다 5월이 되면 가족의 달이라 하여 가족을 다시 생각하는 행사도 많고, 각급 학교에서의 숙제나 활동도 가족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가족에게 편지쓰기, 가족운동회, 가족과 함께 하는 체험활동 등 다양하다. 그 중 아빠에게 편지쓰기를 보자. 직장 때문에 가족에게 소외되는 아빠의 문제가 부각되면서 그 아빠를 격려하고 배려하기 위하여 편지를 쓰고 봉투에 아빠이름 붙여 직장으로 보내는 그 의도는 긍정적이지만, 아빠가 없거나 아빠와 성이 다른데 그걸 굳이 밝히고 싶지 않고, 아빠가 실직하여 마땅히 편지 보낼 직장주소를 써 낼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상당히 상처로 남는 활동들이다. 이러한 사례는 변화되고 새롭게 재구성되어가는 다양한 가족을 소외시키지 않고 더불어 살기 위해 우리의 생각바꾸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임을 상기시킨다.
형태가 아닌 사는 방법에 주목해야
그래도 더 많은 수의 자녀들이 그들을 낳아준 엄마, 아빠와 사는 현실에서 꼭 그렇게 얼마 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고려하고 배려해야 하는가라고 누군가 의문을 제시한다면, 필자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한다. 일단 '얼마 되지 않는'이라는 전제가 틀렸고, 만약 소수라 해도 우리가 더불어 살기를 지향한다면, 그래서 나누고 참여하고 서로 배려하는 성숙한 문화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또 소외와 편견 없이 상호작용하고 싶다면, 이미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수용하고 차별 없이 대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가족이 결핍감이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이 시대를 함께 사는 가족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가족문화가 조성되어야 한다. 가족을 다시 보고 되돌아봄으로써 새롭게, 제대로 보기 위한 시도를 우리가 함께 해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가족과 학교, 직장, 사회 모든 생활현장에서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 사회에 가족의 가치를, 새로운 가족문화를 정착·확산시키기 위한 방법들에 대해서도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 5월 가족운동회를 경험한 어떤 아빠와의 상담이 있었다. 그냥 운동회도 아니고 명색이 5월 가족의 달 행사인 가족운동회니까 모든 가족이 가능한 한 많이 참석해야 한다는 취지도 있고,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인다는 사실에 흐뭇해하며 그 날을 기다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신데 막상 이 아빠는 참으로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직장에 다니는 아빠도 참석할 수 있는 날을 정하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있는 쉬는 토요일이었고, 쉬는 토요일이라 일찌감치 예정되어 있던 직장동료와의 운동, 동창회 모임 등을 다 그 다음 날로 미뤄놓았던 것이다.
주중 장시간 근무에 시달린 상담자는 토요일에는 온 가족이 즐거워야 하는 가족운동회에 참여해서 뛰고 뒹굴고 소진한 다음, 일요일에는 미뤄놓은 약속을 지키느라 월요일 출근이 다른 날보다 힘들었다고 하소연했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가족운동회일 것이니, 다른 가족 모두가 즐거웠다면 그냥 참고 받아들이라 해야 하나, 필자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는 이런 경우 그 다음 날을 부모휴가일로 정해 자녀들의 일로 학교나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의 부담을 줄어주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다양한 가족이 더불어 사는 새로운 가족문화는 지엽적인 행사나 캠페인, 홍보로만 되는 일은 아니다.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
가족은 그들 나름대로 노력할 일이지만 국가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이 있어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국민들은 이를 요구해야 할 권리가 분명히 있다. 필자는 그 형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한다. 몇 년 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소년범죄자 중 훨씬 더 많은 비율은 사람들의 선입관과 다르게 가난하거나 무엇이 부족하거나 이상한 가족이 아니라 소위 부모가 다 있는 정상가정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발표된 바 있다. 결국 어떤 모습으로 사는가보다는 어떻게 사는가 하는 삶의 내용이 더 중요함을 알려준다.
사회구성원 모두 노력해야할 과제
형태가 변하고 가치가 변하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적 변화도 크지만, 그래도 가족은 우리들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이 최초로 만나고 경험하는 생활의 공동체임은 확실하다. 가족 안에서, 가족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과 믿음의 주고받음을 경험한다. 가족은 소속감, 안정감, 편안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로 주고받고 배우고 경험하는 상호존중, 되돌려 받음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배려하는 기쁨, 더불어 사는 삶의 책임과 협력 등은 가족생활을 통해 충분히 경험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들이 전인적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가족 안에만 머무르는 가족이기주의적 현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족이기주의는 사회보장이나 복지수준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의 복지를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왜곡된 대응방식이다. 가족 밖에는 믿을 이 없고, 가족 중 누군가 성공하면 그 가족 모두가 잘 살 것이라는 생각은 과도한 교육열, 그로 인한 계층 간 위화감과 불신 등의 사회문제를 우리에게 남겨놓았다. 다른 가족의 불행과 실패, 낙오를 무시하고 내 가족만 무사하면 된다는 가족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은 가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가치들 -책임과 배려,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 등-을 희석시키고 의심하게 만든다.
따라서 가족이기주의를 극복하고, 가족구성원들 간에 경험하는 긍정적 가치들을 다른 가족과 그리고 사회와 나누는 개방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신뢰, 책임 등은 이제 가족과 사회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교환되어야 하고, 사회적 영역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그래서 최근 들어 부각되고 있는 자원봉사, 나눔, 참여, 평등, 평화 등과 같은 가치가 가족에서 체험될 수 있어야 하며, 가족은 이러한 가치를 배우고 실천하는 평생을 두고 지속되는 중요한 교육현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자면 가족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일은 필수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되 그 본질적 의미와 가치는 지속된다는 전제 하에 이타성과 협력, 책임과 신뢰를 배우고 익히는 가족, 이러한 가치를 가족 내부적으로만 갖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다른 가족 그리고 사회와 활발히 교류할 수 있는 개방된 가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더불어 사는 가족, 나눔과 참여가 실현되는 가족, 이것이 이 시대 새로운 가족문화의 핵심이다. 가족은 평생학습의 현장으로 거듭나야 하며, 개인과 가족 그리고 국가사회가 공동의 노력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5월 가족의 달에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