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대한민국 가족에서 일어난 일들을 단지 '상당한 변화'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후기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가족의 형태, 가족의 기능, 가족 가치관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족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변화를 정리하자면, 가족형태의 다양화, 친밀성의 혁명, 평등성으로의 변화, 가족의 공공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 어떻게 바른 가정의 역할을 정립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다양한 가족에 대한 수용
얼마 전 부산의 한 신문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절반이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입양가정이나 국제결혼은 말할 것도 없이 미혼모(미혼부) 가정, 자발적 무자녀 가정, 동거가구도 가족으로 인정하는 경향을 보였고 심지어 응답자의 20%는 동성애 커플도 가족으로 인정한다고 답변했다. 통계치를 인용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한부모 가족, 재혼가족, 동거 커플, 동성애 커플, 국제가족, 분거·기러기 가족, 입양가족, 공동체가족 등이 증가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혼'이나 '혈연'이 '가족'을 이루는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일반인의 생각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가정이란 무엇인가? 정상가족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혼인으로 맺어진 부모와 친자녀로 이루어진 중산층 핵가족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많은 가족이 이 범주에 적용되지도 않을 뿐더러, 부모 주도적인 폐쇄적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기를 꿈꾸고, 부부는 함께 있어도 진정한 교류를 하지 못해 남모를 외로움에 떨기도 하는 중산층 가족을 종종 보게 된다.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가정일수록 정상이 아닌 경우가 많다. 진정한 가족이라면 가장 안전하고 서로 친밀하게 느끼며,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우군이 되어주고, 힘들 때 기꺼이 인내해주고 시간을 내어주는 관계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가끔 '비정상적' 형태의 가족에서 이러한 진정한 가족관계가 발견되는 일이 적지 않다. 이는 가족의 형태를 가지고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뿐더러, '비전형적' 가족형태는 기능도 병리적일 것이라고 가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다양한 가족의 출현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반영한다. 수천 년간 지속된 농경시대에는 혈통을 바탕으로 한 친족중심 확대가족이 주를 이루었다. 농경시대에는 사람 수가 바로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다산을 통한 가족의 확대는 복의 근원이었다. 산업화는 인류의 사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또 하나의 혁명적 사건으로 '개별화'를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공장, 직장을 따라 이주가 빈번해지고, 부부 중심의 핵가족은 생활과 생존의 기본단위가 되었다.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만연하였으며, 구조적으로는 가족 내 임금노동과 무임금노동에 따른 남녀 간 성별이분화가 뚜렷해지게 된 것이다. 산업화로 촉발된 '개별화'는 후기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도 그 기세를 멈추지 않았고, 이제 우리는 다양한 가족의 출현을 통해 근대 부부중심의 핵가족이 해체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각 시대의 주요한 가족형태는 가족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생태학적 적응 양식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추세 속에 우리에게는 가족에 대한 정상성의 신화, 즉 편협함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삶의 방식에 대한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가족의 형태에 따라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어려움을 다룰 수 있는 교육과 상담, 정책의 준비가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성별과 세대의 간극을 넘어
한편 우리 가족이 갖고 있는 심각한 어려움 중 하나가 성별 간의, 또 세대 간의 심화되고 있는 의식 차이이다. 가족은 기본적으로 성별과 세대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 집단인데 성별과 세대 간의 간극이 넓어진다는 것은 가족갈등과 소외가 깊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가족은 화성인과 금성인이 함께 산다고 표현할 정도로, 남성과 여성이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남녀 간 의식 차이의 이유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여성의 의식 변화는 빠른 반면 기득권을 가진 남성의 가치관의 변화속도는 느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결혼생활 만족도가 더 낮으며, 이혼제기율은 더 높다. 대다수 남편들은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만, 아내들의 경우 남편과 다시 살고 싶지 않다는 응답이 높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연구에서 결혼관, 가족관, 성의식, 성역할, 사랑관, 배우자관 등에서 심각한 남녀 학생의 의식 차이가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었다. 다양한 가족에 대한 수용성 역시 남성보다 여성이 더 높다. 이러다보니 남성과 여성의 의식 불균형 상태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소외시키며 두 성(性)간의 진실된 교류를 차단하게 되었고, 높은 이혼율은 이러한 성별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세대 간의 의식 차이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특히 20대의 여성은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반면 50~60대의 여성은 가장 보수적이다. 한 가족 안에서 어머니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상반된 가치관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정보화 시대에서 컴퓨터 조작과 정보의 근접이 어려운 구세대는 오히려 신세대로부터 배워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신세대에서 구세대로의 '역사회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보니, 부모세대가 자녀세대에게 권위를 내세우며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적이며 친밀한 관계, 평등성에 입각한 새로운 세대관계의 제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가정내 중심은 부부간 애정
산업화 이후 가족의 여러 가지 기능 중 유독 강화되고 있는 기능이 애정의 기능이다. 과거 가족이 수행했던 종교적 기능이나 교육의 기능 등은 사회의 여타 제도로 흡수, 대행되고 있지만, 가족이 제공하는 정서적 지지와 애정의 기능은 다른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다. 후기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개인의 성욕구와 낭만적 사랑에 대한 추구가 더욱 강해졌고, 따라서 과거의 가족은 '애정'이 좀 부족하더라도 가족이 유지되어야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애정'과 '만족스러운 성생활'이 결혼유지의 중요한 조건이 되어가는 추세이다.
우리사회의 가족은 빠른 속도로 '부모-자녀 중심'에서 '부부 중심'으로 중심축이 이동되고 있다. 여전히 많은 부부가 자녀 중심적 생활을 하고 있고 불만족한 결혼생활에도 불구하고 자녀 때문에 이혼을 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젊은 세대로 갈수록 배우자와의 사랑에 비중을 두며 자녀보다 배우자를 중시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30여 년 전보다 평균수명이 자그마치 20살이나 늘었고, 평균자녀수는 1/5로 줄었으며, 이혼율은 3배 이상 늘었다. 자녀를 위해 여전히 많은 투자를 하지만, 자녀보다는 배우자와 지내는 시간이 늘어 배우자 선택에 보다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연령은 높아지고 혼전 동거는 늘게 되었다.
아무리 신중을 기해도 부부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기간이 워낙 길다보니, 사별로 인한 헤어짐보다 이혼으로 인한 결혼생활의 종결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는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자녀가 성장해 집을 떠난 후에도 부부가 함께 해야 할 시간이 상당히 늘어난 것이 주요 이유이다. 자녀가 떠난 후 길고 긴 중·노년기 동안 둘만 남아 서로 공통된 대화의 화제도, 취미도 없다면 참으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순한 '추세'나 '경향'을 떠나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가족의 중심축이 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남남이 만나 자기 몸처럼 아껴주는 모습을 보면서, 자녀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하는 것인지 배운다.
여성의 부담, 남성의 소외
요즘 부모들은 딸 하나 잘 키우면 아들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고, 딸의 교육에 아들 못지않게 몰두하고 있다. 아들선호사상도 눈에 띄게 감소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지금, 여성들의 인생 부담이 더 적어진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중년 여성이 자녀(아랫 세대)를 돌보는데 평균 17년, 부모(윗 세대)를 돌보는데 평균 18년의 세월을 보낸다는 보고가 있다. 우리나라의 여성도 경우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평균수명이 점점 길어지므로 중간세대 여성은 앞으로 더 긴 세월을 아랫 세대와 윗 세대의 돌봄과 부양에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증가하면서 여성이 책임져야하는 가사노동, 돌봄노동, 임금노동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이러한 여성의 과도한 부담은 바로 혼인기피와 저출산의 문제로 연결된다. 한편 여권의 신장과 함께 여성의 부담이 급증하는 다른 한 쪽에서는 남성의 소외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 가부장제도 하에 권위로 군림하던 남성은 어느 새인가 돈 벌어오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가족의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족의 정서적 관계에서 어머니는 중심인물로서 자녀, 친족관계를 장악하고 있는 반면, 아버지는 가부장제 가족의 가장이라는 가면 뒤에 늘 겉도는 가족 아닌 가족이 되어버렸다. 직장에서 퇴직이라도 하고나면, 이러한 가족 내 남성 왕따 현상은 더욱 극심해져 허무함, 심하면 우울감을 갖게 되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오늘날의 가족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중심에는 여성의 과도한 부담을 나누는 것과 뿌리 깊은 남성의 소외를 극복해야하는 과제가 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부담과 소외를 이해하고, 어루만져줄 수 있어야 한다.
자녀를 제대로 사랑하기
가족이란 내 배우자와 자녀를 사랑하고 돌봄으로서, 나 아닌 타인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훈련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어느 누구도 제대로 사랑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배우자와 좋은 친구로 우정이 식지 않도록 노력하기, 갈등을 지혜롭게 극복하기 등 결혼생활은 노력 없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녀를 제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아이가 필요한 의·식·주를 제공하고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사회적 기술을 습득시키는 것에만 국한하면 안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자녀 사랑법이 있다.
첫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모가 서로 사랑하고 보듬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이 자녀에 대한 가장 큰 사랑 방법이다. 부모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후에 본인도 그러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자녀를 잘 키운다는 것은 잘 떠나보낸다는 것이다. 자녀에게 과도하게 기대하는 것, 내 인생의 미해결된 꿈을 자녀의 삶에 부담지우는 것 등은 자녀가 부모를 떠날 수 없도록 옭아매는 결과를 가져온다.
셋째, 자녀에게 함께 부대끼며 싸우고 놀 형제를 주어야 한다. 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더라도, 형제 없이 자라는 아이는 여러 측면에서 박탈될 수밖에 없다. 요즘 가슴으로 낳는 아이라고 하여 연예인을 비롯한 공인들의 공개입양이 늘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생물학적 친자녀 못지않은 사랑을 느낀다고 입을 모으며, 사랑을 줄 수 있도록 해준 입양아들에게 고마워 한다.
넷째, 부모가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가족이 속한 공동체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들(장남)이 부모의 노후를 책임졌지만, 요즘은 아들, 딸 불문하고 자녀교육에 몰두하는 부모가 늘고 있다. 종종 '어머니 CEO 투자 주식회사'라 할 정도로 어머니가 기획한 가족상황에서 자녀의 교육과 출세를 위해 몰두하는 중산층 가정이 목격되곤 한다. 그러나 자녀에게 물려주어야할 것은 돈과 출세방법이 아니라 가족의 사랑이다. 가족이기주의에 빠지지 않은 부모의 모습은 아이의 미래 공동체의 모습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제도'에서 '관계'로 의미변화
"TV를 없애면 강북가족이 해체되고 애완견을 없애면 강남가족이 해체 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가족은 TV와 애완견을 매체로 간신히 지탱되고 있다는 자조적인 말이다. 과거에는 타인의 존경을 받고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사는 삶을 성공적인 삶으로 보았다. 그러나 최근으로 올수록 남 보기에 그럴 듯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소박하고 진정한 관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혈연과 제도를 넘어선 관계를 가족으로 인정하는 추세는 바로 가족이 '제도'에서 '관계'로 의미가 변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존경을 받으며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지만 안은 텅 빈 가족보다, 소박하지만 친밀하고 진실된 관계를 제공하는 가족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자녀 사랑법은 개인과 사회의 영성 수준과 관계있다. 자녀가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의 소유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전제조건이다. 요즘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들의 처지는 공사장 트럭 한 구석에 둥지를 틀어야하는 새와 다를 바가 없다. 둥지를 틀어 새끼를 낳고 먹이를 주려면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인간의 사랑하고 싶은 욕구, 사랑 받고 싶은 근본적인 욕구는 가족과 자녀에게 태초부터 주어진 것이다. 미래의 가족은 열린 가족일 것이다. 혈연과 지역, 국적, 인종, 지역과 제도를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 가족이 제시될 때, 우리는 안전하게 아이를 낳고 행복한 인간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