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그렇다는 거지!

2007.09.01 09:00:00

우리 사회가 먹고 살만 하니까 생겨난 소통의 여유 징후라고나 할까. 사석에서라도 능동적 발신자가 되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생리를 반영한 것이라고나 할까. 우리 생활 주변에 우스개 이야기가 부쩍 많아졌다. 이런 현상을 불러오게 된 원인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이런 현상의 결과로 보아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 공간에는 각종 우스개 이야기들이 떠돌아다닌다.


언제부터인가 생활 주변에 우스개 이야기가 부쩍 많아졌다. 우리 사회가 먹고 살만 하니까 생겨난 소통의 여유 징후라고나 할까. 사석에서라도 능동적 발신자가 되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생리를 반영한 것이라고나 할까. 소통의 여유를 가지는 사회는 토론을 풍성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사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기도 한다. 너나없이 재미있는 이야기 한두 개쯤은 챙겨 가지고 다니면서, 고만고만한 친교의 자리에서 적절하게 활용한다.
이런 현상을 불러오게 된 원인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이런 현상의 결과로 보아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 공간에는 각종 우스개 이야기들이 허다하게 떠돌아다닌다. 학자들은 ‘새로운 구비문학의 시대’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우스운 이야기도 자꾸 들으면 면역이 생기는 모양이다. 어지간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웃으려고 들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스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마음에 소통의 건강성이 있기도 하다.
우스운 이야기에도 여러 층위가 있어서 질박한 웃음을 불러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지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웃음도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종류의 우스개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내용 자체는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터무니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무언가 공감의 마당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으로는 소통의 매개거리들이 많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열린사회’의 한 양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일전 어느 자리에서 한 친구가 모임의 분위기도 살릴 겸, 우스개 이야기 하나를 꺼내었다. 요즘 나돌아 다니는 우스개 이야기의 전형이다. 이야기의 요지는 이러하다.

어떤 사나이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왔더란다. 사나이와 의사가 나눈 대화는 이러했다.
“의사 선생님, 침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군가가 침대 밑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침대 밑으로 들어가면 누군가가 침대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거 참 미칠 지경입니다!”
“2년 동안 매주 세 번씩 나한테 와서 치료받아야겠군요.”
“치료비는 얼만데요?”
“한 번 올 때마다 5만원이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간 사나이는 그 후 병원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6개월 후 의사는 그 사나이를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쳤다.
“왜 병원에 다시 오지를 않았죠?”
“한 번에 5만원씩 들여가면서 어떻게 갑니까? 우리 동네 목공소 아저씨가 단돈 만원에 고쳐준 걸요.”
“아니, 어떻게 고쳐주었다는 말이요?”
“간단하던데요. 침대 다리를 없애버리라더군요.”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들 웃었다. 과장된 황당함이 웃음을 불러오기에 충분했고, 정신적 고통을 물리적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되지 않는 발상이 재미있었다. 생각을 좀 깊게 해 보자면,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잘난 체하는 모습에 한방을 먹이는 듯한 풍자가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그렇게 느껴도 그만, 그렇게 느끼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이야기를 지어내자니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굳이 의미를 규정하거나 해석을 통일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웃자고 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 중에 의사 친구 한 사람이 정색을 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야기가 근거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우스개 이야기라도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이야기라야지, 엉터리없다는 것이었다. 침대 위와 침대 밑에 누군가 있을 것이라는 불안의식을 치유하는 데 그리 많은 치료비가 든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환자의 증세가 침대 다리 자르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냐고 다소 흥분하여 따지고 들었다. 아마도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그리고는 기어이 이런 말 한 마디를 내뱉으며 말문을 닫았다.
“비싼 밥 먹고 쓸데없는 소리 하고 다니지 말아라.”

웃자고 한 이야기인데 상대가 불쑥 화를 내면 그것처럼 민망한 것도 없다. 모든 이야기를 사실에 근거하여 시시비비를 굳이 가리기로 친다면, 이 이야기는 결함투성이의 이야기이다. 처음 이야기를 한 쪽에서 민망하기는 하지만 사태를 수습하려고 들었다. ‘어디 이런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다고 했느냐. 웃자고 만들어낸 이야기 아니냐.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말도 못하느냐.’ 이런 식으로 화를 낸 친구에게 이해를 구하였다.
그랬더니 화를 낸 친구는 누그러지기는커녕 더 날카로워졌다. ‘말이 그렇다는 거라고? 말도 못하느냐고?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해야 될 말이 따로 있지, 그 따위로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달리 방도가 없다. 이야기를 꺼낸 쪽에서 거두절미하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한다. 네 마음을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물론 그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회복되기 어렵다. 머쓱해지는 분위기, 어딘가 불편하고 답답한 소통 단절의 씁쓸한 분위기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쉽사리 사과하지 않는다. 기왕에 분위기는 망가지게 된 것. 오히려 역공을 퍼붓는다. 여기에는 물론 상대가 너그럽게 들어주지 못한 데 대한 서운함이 깔려 있는 것인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역공에 나서는 것이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속아지가 밴댕이 속 같이 좁아 터져 가지고서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들이대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서해 바다에 가서 밴댕이하고나 놀아라.’ 이렇듯 거침없이 야유성 공세를 취한다. 이쯤 되면 싸움은 점입가경에 드는 것이고, 양쪽 다 잘한 놈도 없고 못한 놈도 없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형세를 연출하게 된다.
말이란 엄격하고 정확하기도 해야 하지만 그것이 말의 전부는 아니다. 그 엄격과 정확에 집착할수록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 소통의 본질을 놓쳐 가면서까지 부스러기 말의 정확성에 매몰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말이 말 그 자체로 완벽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영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말이란 기껏해야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분과 사람의 뜻과 사람의 사는 모습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도 아주 불충분하게 드러내는 도구이다. 사람들 사이를 원활하게 하는 말이라면 그것이 곧 사람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반영된 말이다. 좋은 소통은 ‘뜻·마음’들 사이에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도 못해 보나.’
이 말은 실없이 해 본 말을 상대가 무어라 이의를 달 때, 슬그머니 변명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현실을 초극하려는 인간의 열정과 상상력이 매몰찬 현실과 늘 맞서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열정과 상상력은 언어를 통하여 비로소 소통된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우의(寓意)로서 살아나 인간의 지혜를 밝혀 나아가게 한다.
젊은 날 내 존재와 영혼 모두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냈던 절절한 연애편지의 언어들은 어떠했는가. ‘하늘에서 별을 따다 그대에게 드리리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그대에게 드리리다. 나와 결혼해 주면 평생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도록 하리다’등등. 이런 약속의 언어들이야말로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의 영역에 속하는 언어들이다. 이렇게 받은 사랑의 메시지들을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공증받아 두고, 훗날 약속 이행을 왜 않느냐고 다그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아직 듣지 못하였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하는 것은 알면서도 즐겁고 감격스럽게 그것을 받아 준 것이다.
일제 억압과 수난의 현실을 살며, 광복의 그 날을 절절한 마음으로 소망하던 그 열정과 해방의 상상력을 표출한 시 가운데 우리는 심훈의 <그 날이 오면>을 익히 알고 있다. 시인은 광복에 대한 열정어린 감격을 특유의 시적 상상력으로 보여 준다.
그 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그는 어떻게 하겠다고 했던가.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겠다고 한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으니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겠는가고 말한다. 그 뿐인가. 그날이 오면 드는 칼로 자기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겠다고 말한다.
심훈 선생은 아깝게도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만약 선생께서 광복을 보셨다면, 과연 종로 인경을 울리려다 두개골이 깨어지고, 칼로 살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치고 다녔을까. 이런 질문이야말로 우문이다. 숨어 있는 열정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사실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과 말의 작용을 크게 보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우문이다. 그러고 보니 문학이야말로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의 방식으로 인간의 숨은 열정과 상상력을 드러내며, 말의 감동적 효용을 실현하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현재의 사실 세계를 넘어서려는 ‘열정과 상상력의 말’을 창공 높이 자유롭게 쏘아 올리려 한다. 인간에게 말이란 그러한 것이다. 그걸 두고 ‘비싼 밥 먹고 헛소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의 본질 기능 하나를 거세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니 인간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도 너무 모자란다.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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