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시절

2010.02.01 09:00:00

누구나 가끔씩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무언가 큰 성과를 거뒀다거나 정말 중요한 인연을 만났다거나 하는 등 삶에 큰 전환점을 이룬 시기가 먼저 뇌리를 스치겠지만, 어쩌면 정말 최고의 순간은 그런 큰 일이 있었던 시기가 아니라 평범했지만 행복으로 충만했던 일상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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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동창인 친구 M과 나는 그날 서울 역삼동 근처 생맥주집에 있었다. 우리 둘 말고도 몇 명 친구들이 더 있었다. 오랜만에 모여 저녁 함께 먹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맥주 한 잔 나누자고 들어간 자리였다. 유수한 시중은행의 부행장으로 있다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M이 맥주 값은 자기가 내겠노라 선언을 한 터였다.

고향 친구들이 우르르 모이는 자리는 영락없이 시끄럽다. 자기들끼리의 친숙함과 격의 없음을 과시라도 하듯, 화끈한 직설법 농담들이 퍼질러진다. 때로는 형편없이 유치해지기도 해서 막무가내 우기기식의 화법도 등장한다. 이야기 중에 추억담이라도 실리면,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녀석들의 목소리는 높아진다. 이런 자리에서는 진지한 화두를 꺼내어 대화의 격조를 살리기는 어렵다. 그래 보았자 잘난 척하는 꼴로 오해받거나, 공연히 좌중을 썰렁하게 한 죄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밥 굶었던 이야기를 위시로, 누가 더 꽁보리밥을 많이 먹었다는 둥, 교복 기워서 입고 다닌 이야기, 교과서는 으레 헌 책으로 구입했다는 둥, 대학 3학년 때 맥주를 처음 얻어먹고서는 석 달도 넘게 맥주 먹었다는 자랑을 하고 다녔다는 둥, 끝이 없었다. 어른 세대가 가난을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데에는, 가난 자체를 예찬한다기보다는 그 가난을 잘 극복하고 성공을 이루었다는 자기성취에 대한 긍정의 정신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옛날에도 가난했고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난 추억’이 조금도 신명날 리 없다.
가난 이야기가 한 순배 돌아 나가자, 우리는 그 가난을 딛고 얼마나 ‘잘나가는 시절’을 살았는지를 이야기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이동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내 생애 최고의 시절’에 대해서 거리낌 없는 자긍심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종합무역상사의 엘리트 에이전트로서 찬란한 수출 업적의 영광을 누렸던 이야기, 해외 건설 현장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공사를 마침내 해냈을 때의 감격 넘치던 시절 이야기로 이어졌다. 자기 체험이 모자라면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친구들의 ‘잘 나가던 시절’까지도 다 불러 모았다. 누구는 돈 많이 벌어서 호기로 기부사업하며 돈 잘 썼다는 이야기, 또 누구는 정계로 진출해 옛날 궁색함을 말끔히 씻었다는 이야기, 또 그 누구는 군대에서 장군이 되었다는 이야기, 또 누군가는 사법고시 합격해서 진작에 부잣집 사위 되었다는 이야기도 빠질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 분위기에 조금씩 어정쩡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궁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나도 한마디 하기는 해야 할 텐데. 요즘 유행하는 ‘대략 난감’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 같았다. 내게 ‘생애 최고의 시절’이란 어떤 때이었던가. 공부해서 선생 되고, 논문 쓰고, 책 쓰고…. 뭐 그런 이야기를 자랑처럼 해야 할 분위기 같은데, 그게 무슨 생애 최고의 보람에 들어맞기나 한 것인가. 끙끙대는 내 속을 알아차렸는지 친구들이 내 고충을 시원스레 해결해주었다.
“너는 아직 정년이 여러 해 남았지 않나. 우리 대부분은 이미 은퇴를 한 신세인데. 그것만으로 너는 잘 나가고 있음을 현존(現存)으로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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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M이 말문을 열었다. 은행의 고위직 간부를 하는 동안은 스케줄이 너무 가파르고 빽빽했단다. 끊임없는 회의와 의사결정의 연속 속에서 늘 시간은 부족해, 신문도 제대로 못 읽어서 부하 직원이 관련 업무 중심으로 스크랩해주는 것을 간신히 차 안에서 살펴보기 바쁠 정도란다. 중요한 사안마다 무거운 책무감으로 거듭 짓눌리는,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지내고, 일과 이후는 수백 개 거래 기관의 각종 경조사를 비롯한 공식, 비공식 행사들에 은행을 대표해 참석하고 귀가하면 밤 10시가 훌쩍 지나는 그런 일과였단다. 가족들과의 대화는 미루어지기 일쑤이었단다.
이 대목에서 친구들이 어김없이 말한다.
“그래도 그 자리를 아무나 하는 거냐? 너 부러워했던 사람 줄줄이 줄로 서 있었다. 그게 너 잘나가던 시절을 입증하는 거야! 이 친구, 뭘 몰라.”
M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자기 이야기를 계속한다.
“너희들 잘 알잖아. 옛날에 내 아버지의 일 실패로 우리 집 가계 완전히 파탄 나서 생계는 암담한데다, 억울하고도 대책 없는 빚에 쫓기고 몰려, 상계동, 남가좌동 서울 변두리 외곽 가난한 동네에 셋방으로 전전하며,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세 동생과 함께 여섯 식구가 참 힘들게 살던 시절 있었잖아. 그 어려운 형편이 말이야, 내가 대학 들어가던 무렵부터 시작해, 군대 3년 갔다 오고, 허겁지겁 바로 직장이라고 잡아서 여러 해를 근무하며 지날 때까지 조금도 나아지지 않더라구. 돈이 워낙 없었으니 나아질 형편이 어디 있겠어!”
우리는 모두 M의 절친한 친구들이었으므로 그 무렵 20대의 M이 겪었던 어려운 고초를 알고 있었다. M은 장남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다녔는데, 갑자기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빨리 취직해 식구들의 가계와 동생들을 다급하게 돌보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법대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고시공부 자체가 일종의 호사였다. 해 볼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M의 말이 계속되었다.
“남가좌동 변두리 셋방에 살 때였어. 내가 제대해서 바로 취직해 직장 다닐 때인데, 내가 우리 가족들 생계, 또 동생들 학비 등을 대충 감당해야 하는 처지였지. 식구들이 나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가득 담고 있었던 것 같아. 여러 세대 세 들어 사는 집이라, 겨울 아침이면 마당 수돗가가 복작거렸어. 세숫대야에 더운물 담아 와서 세수하느라 줄을 섰었지. 동생들이 먼저 일어나 세수 순서를 잡아 놓고 있다가, 내가 일어나 나가면 얼른 그 자리를 내게 내어 주었어. 그때 통행금지 있었잖아. 고단하기 짝이 없는 일과였지. 회사 일 늦게 끝나고, 버스 종점 정류장 내려서 털레털레 들어가면, 아버지,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온 식구가 다 대문 앞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 눈빛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 방에 들어오면 누이는 마치 다정한 아내인양 옷을 받아 챙겨주고, 어머니는 얼마나 다정하게 날 다독거려 주는지. 내 목이며 팔이며 안마를 해 주었지. 내가 아프기라도 하면 온 식구가 극진으로 염려하고 보살피는 거야.”
M의 이야기가 약간은 청승맞아지자, 친구들은 한편으로는 감응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따분해진 기분이 되는 것 같았다. 마침내 친구들이 M에게 이야기의 행방을 재촉했다.
“그래서 뭐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그거 우리 다 아는 이야기 아냐?”
M이 머쓱하고 한 번 웃더니, 바로 말을 이어받았다.
“내 말은… 그 시절이 바로…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이었다는 이야기야. 부모님과 형제 가족 모두에게서 사랑과 인정과 감사와 보살핌을 그렇게 오롯하게 받은 적이 있었던가 싶어.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은 바로 그 시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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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M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자기의 삶을 그렇게 품격 있게 해석하는 그의 윤리가 한 송이 꽃처럼 고상하고 아름다웠다. 내 욕구나 소망은 밀쳐둔 채, 가족 모두의 생계를 걸머지고 허덕거리는 일상이 얼마나 고단했으랴. 힘든 고역의 팔자를 탓하기로 시작했다면, 가족인들 얼마나 성가시고 무거운 짐이었을까.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는지에 따라 우리는 천국에 다다를 수도 있고 지옥의 나락에서 고통으로 신음할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명절에 대가족이 모여 여러 형제들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속이 상해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단다. 한국인들이 좀 잘살게 되면서부터 생겨난 병통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속이 상하는 것은 나와 다른 형제들을 이기적 마인드로 비교하는 데서 생기는 불행이다. 누가 더 좋은 물건 들여놓고 잘 사는지, 누가 더 명절 준비 고생을 했는지, 누가 부모에게서 더 보상을 받지 못했는지, 누가 더 출세했는지, 누가 더 잘난 체하는지 등등 이런 것들에 열심히 이끌려 다니다 보면, 우리는 어김없이 내 행복을 내 마음에서 내몰아 버린다. 그렇게 진부하게 듣고 다니는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 그렇게 실천하기 어려울 줄이야.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던 우리 시대의 석학 이어령 교수가 이화여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할 때 어떤 신문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았다).
“교수님께서는 장관으로, 작가로 예술가로, 교수로서 일생 살아오면서 많은 일을 하시고 큰 업적들을 쌓으셨는데, 그중에서 어떤 것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위대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어령 교수의 대답은 좀 의외였다.
“오월 봄날 제 연구실 창밖으로 젊은 학생들이 밝은 음성과 웃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간간 그들의 기쁘고 맑은 환성이 들려오는 시간, 바로 그 시간이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하고 위대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최고’란 무엇이고, ‘최대’란 무엇인가.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철학자 버틀랜드 러셀은 말한다. 행복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적절한 결핍’이라고. 그렇다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을 내가 지닌 어떤 결핍과 더불어 떠올려 보아야 할 것인가.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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