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馬)과 인간, 말(馬)과 무대

2010.12.01 09:00:00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는 말(馬)을 소재로 한 연극이 몇 년째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말은 인간이 길들이기 훨씬 전부터 우리가 상상하는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해 왔었다. 지상의 동물 가운데 가장 느린 육식 동물인 인간으로서는 말의 아름다움보다는 그 강인함과 찬탄할만한 속도와 크기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쩌면 인간은 언어를 다듬기보다 우선 말을 길들이는 것에 더 큰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인간과 말의 관계는 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라 일컬어지는 개만큼이나 인간에게 빨리 길들여졌으면서도 완전히 인간의 생활 속으로 들어와 앉은 개와는 달리 근세까지도 야생상태를 유지하면서 그들만의 사회성을 유지해온 특별한 동물이다. 그러나 설령 자연에서 야생상태로 살아왔다 하더라도 한 번 인간의 손에 의해 길들여지고 나면 타고난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지닌 채 야생을 포기하고 인간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애정, 우정을 제공해왔고 필요할 때면 위안을 주며 걱정과 근심을 끈기 있게 들어주는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그 예민하고 다정하면서도 사랑으로 가득 찬 말의 검고 깊은 눈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적이 있다면 이들이 사실은 인간에게 아름다움의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지구에 내려온 존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물론 말은 서커스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을 위한 재롱을 부려오곤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은 그 압도적인 존재감 자체로서의 가치 이상을 무대 위에서 선사하지는 못해 왔다.
이를테면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가장 오래된 인기 레퍼토리인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경우 라다메스의 개선 행진곡 장면에서 말이 양쪽에서 두 마리씩 올라옴으로써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지만 그것은 살아 있는 말이라는 하나의 오브제로서의 스펙터클한 효과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식품과도 같은 역할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가장 오랜 친구 중의 하나인 말이 공연무대에서 객석의 관객과 어떻게 교감하면서 어떻게 배우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여기 소개하는 두 공연에서 그리는 말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말, 결코 일방적이지 않은 관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표현하는 완벽한 말의 형상과 감정
연극 <군마> (War Horse)

2007년, 런던에 위치한 국립극장에서는 전 연령대를 울리는 가슴 뭉클한 연극 한 편이 큰 화제를 모았다. 소년과 말의 눈물 어린 우정을 다룬 연극 <군마>(軍馬, War Horse)에는 실제 크기의 말 인형이 관객들의 감탄과 감동을 자아냈고 이듬해 웨스트엔드로 옮겨져서 현재까지도 수년째 장기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진짜 말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마치 실물처럼 정교하게 제작된 생생한 말 인형이 주는 진정성이 나를 포함한 전체 관객을 흠뻑 적셨다.

군마는 앨버트라는 소년의 성장기이자 그 소년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말 조이의 전쟁 경험담이기도 하다. 영국 국립극장은 프랑스 동화작가 미쉘 모퍼고의 동명 소설에 기초한 말과 소년의 우정을 그린 연극 <군마>의 제작에 몇 년간 매달렸다. 어린이뿐 아니라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레퍼토리 개발에 힘써온 국립극장은 그간 동화적인 스펙터클을 구축해오는 데 일가견을 보여 왔다. 2004년에는 필립 풀먼의 판타지 모험소설 <신의 어두운 세계(His Dark Material)>를 무대화하면서 뮤지컬 <라이언 킹>의 인형제작자 마이클 커리가 가담해 실감 나는 무대를 선보였다. 2006년에 개막한 <코람 보이>(Coram Boy) 역시 어린이 도서상을 수상한 자밀라 개빈의 모험소설을 기초로 한 서사극이다.

<군마>의 원작은 닉 스태포드가 각색했으며 무대 위에는 실제 말은 한 마리도 출연하지 않는 대신 나무로 만들어진 정교한 실물 크기의 인형들이 ‘말 연기’로 감동을 선사한다. 인형은 모두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세계적 인형극단인 핸드스프링 인형극단이 제작했다. 전쟁 중인 아일랜드의 가난한 소년 앨버트에게는 아버지의 주사로 인해 느닷없이 생긴 망아지 조이가 유일한 친구다. 퍼펫티어(인형조종자)는 앨버트의 키만 한 작은 망아지 인형을 움직이며 앨버트와의 첫 만남을 만들어낸다. 이 망아지는 새침을 떨며 등장해 앨버트의 애간장을 태우는 동안 관객들은 퍼펫티어의 존재를 잊게 만든다. 당근도, 정성스레 쓰다듬어도 본체만체하며 앨버트를 애태우던 망아지 조이가 앨버트를 받아들이고 사료를 먹는 장면에서는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다.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된 앨버트와 조이지만 너무 힘든 살림 때문에 어느 날 아버지가 앨버트에게 말도 없이 조이를 군마로 팔아버리면서 그들에게는 갑작스런 이별과 시련이 닥친다. 조이를 잘 돌봐줄 거라 믿었던 다정한 장교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앨버트는 집을 나가 나이를 속이고 군대에 지원한다. 자신의 친구 조이를 찾기 위해. 한편 조이는 적군에 포획되어 전쟁의 참혹함을 맛본다. 전쟁 장면은 레이 스미스의 역동적인 무대디자인과 폴 콘스터블의 극적인 조명으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을 만들어주면서 비정한 전쟁의 한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모든 관객이 손수건을 꺼내 드는 곳은 결국 마지막 장면이다. 전투에서 눈을 다쳐 붕대를 맨 앨버트는 이제 조이를 봐도 알아볼 수가 없지 않느냐며 절망하는데 바로 그 옆에서는 장교들이 적군으로부터 포획한 조이가 기운이 빠져 일어나지 못하자 사살하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는 중이다. 앨버트는 마지막으로 조이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조이를 부를 때면 늘 불어왔던 휘파람을 불고, 그 소리를 들은 조이는 꺾인 무릎을 세우고 앨버트를 부르며 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앨버트는 조이의 울음소리에 휘파람을 멈추고 조이의 목을 끌어안고 관객과 하나가 되어 울음을 터뜨린다.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한 신파극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이 작품이 그토록 큰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사람과 같은 크기의 말들이 주는 존재감 때문이다. 섬세한 무대 디자인과 조명, 열연하는 배우들을 넘어서는, 실물 크기의 말 인형의 섬세한 동작과 감정표현은 말이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인간보다도 우직하면서 인간보다 더 섬세한 그들의 감정을 인형으로 표현해 이 작품은 런던에 말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말을 너무나 사랑한 소년
연극 <에쿠우스>

너무나 유명한 피터 쉐퍼의 작품인 <에쿠우스>는 제목 자체가 ‘말’(Equus)이란 뜻의 라틴어다. <군마>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앨런이라는 소년에서 성인으로 가는 한 남자와 말이 나누는 교감이 주요 쟁점이다. 앨런의 부모는 매우 억압적인 인물들이다. 집에서 TV도 보지 않으며 바깥세상의 청소년들이 물들어가는 ‘악’으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렇게 과하게 다른 친구들과 다른 억압을 받아온 앨런은 자신이 숨을 곳을 찾게 되고 그게 바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마구간이다. 앨런은 부모의 엄격한 신앙심 때문에 매일매일 들어야 했던 성경구절을 마구간의 말들에 대입해 마치 말이 신인 것처럼 떠받들고 사랑한다. 그리고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 말이 과연 신처럼 떠받들림을 받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보이게끔 아름다우면서도 위엄 있게 그려지는 것이다. 키가 크고 건장하며 몸매가 유려한 배우들이 말 가면을 쓰고 말의 역할을 맡는데, 이런 의도 자체가 말이 얼마나 인간에게 멋지게 보이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즉, 말은 섹시하다.

하지만 이 연극의 결말은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다소 참혹하게 느껴질 것이다. 바로 앨런이 자신의 행동에 지나친 죄의식을 품은 나머지 말들의 눈들을 모두 찔러버리기 때문이다. 앨런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생기는데, 이 여자 친구가 사랑을 나누자며 앨런이 가장 신성시하는 마구간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앨런에게 있어서 말들이 잠자는 마구간은 부모님이 알려준 교회와도 같은 곳이었기에 말들이 눈을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곳에서 옷을 벗고 사랑을 나눈다는 사실에 갈등을 겪다 결국은 파국에 치닫는 행동을 저지르고야 만다.

말에 대한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정신까지 놓아버리는 인물인 것이다. 이 작품은 2008년 영화 ‘해리 포터’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다니엘 래드클리프 주연으로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도 끊임없이 공연되는 명작이다.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조용신 공연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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