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운동이 등산이다. 자연이 주는 좋은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음은 물론 산 위에 앉아 하염없이 자연을 바라볼 수 있고, 사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당일치기 등산은 주로 혼자가거나 집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 대개 일요일 등산은 아침 8시경에 우리 동네를 출발해 10시나 11시에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후 3~4시경에 하산해서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돌아오는 오후 시각의 도로는 밀리게 마련이며 집에 도착하면 저녁 시각을 훌쩍 넘길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술까지 한잔하게 되면 매주 일요일 오후에 계획된 신문 스크랩과 악기 연습 등에 큰 차질이 생긴다.
궁여지책으로 산 아래에서 아침 일찍 만나자고 친구들에게 제안을 했다. 그 중에 두 팀이 찬성을 해 지금은 산의 거리와 계절에 관계없이 아침 7시에 목적지 산 입구에서 만난다. 갈 때와 올 때 차 밀리지 않으니 좋고, 술 한잔할 일도 없으니 집에 도착하면 오후 2~3시경이 된다. 처음에는 시큰둥했으나 이제는 오후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어 친구들도 좋아한다.
자연계에는 중력이나 관성의 법칙 등 인간이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시간 또한 매일 86400초로 한정되어 있으며 과다지출이나 과소지출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일정하게 주어진 시간을 죽이든 살리든(?) 전부 사용해야 한다. 내일을 위해 저축하거나 저장할 수 없으며 마음대로 늘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번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엄연한 시간의 법칙을 우리는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들만이 새벽달을 만나볼 수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 스물네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유용하게 쓸 줄 아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연의 은혜다’라고 말한다.
삶은 시간이다. 시간은 성장을 위한 재료이며 가능성이다. 더욱이 삶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영역이기에 참으로 소중하다.
야스퍼스나 하이데거, 사르트르, 까뮈 등 소위 실존주의자들의 사유(思惟)도 결론적으로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고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그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이용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서사(敍事)를 불어넣어야 한다. 그것이 살도록 명령받은 생명(生命)으로서의 의무이다.
시간 살리기
어느 시골의 자그마한 기차역에 앉아 있다. 다음 기차는 빨라야 네 시간 후에나 온다. 시계를 들여다보고 하릴없이 길가의 나무를 세면서 권태롭게 기차를 기다린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5분이 지났다. 역 건물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거닌다. 그러다가 문득, 또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린다. 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 죽이기는 계속된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의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에 나오는 글이다.
시간 죽이기(Killing Time)는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 이 표현은 뉴욕타임스 1893년 9월 8일 5면의 헤드라인에서 ‘상원에서의 시간 죽이기 : (법 등의) 폐지를 견제하기 위한 시간을 끄는 전략’ 이라는 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우리는 종종 무의식적으로 TV를 켜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항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간 죽이기’를 한다고나 할까.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관리하기가 어렵기에 보이게 해서 관리하는 것이 좋다. 현재의 시간 사용 내역을 기록하면 시간의 순도(純度)가 높아진다. 하루 동안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일주일 동안의 시간을 분석함으로써 실제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집중도도 높아진다.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일도 기록을 함으로써 의식 속에 둘 수 있게 된다. 의식하지 않으면 시간이 무한히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이에 기록해보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일, 한 번에 몰아서 할 수 있는 일 등 하루 중에서 잡다하게 낭비되는 시간이 꽤 많다는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산발적인 이메일 확인 및 답장쓰기,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시간 손실이 많았다. 특히 각종 서류 및 자료, 물건 등을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잘 몰라 그것을 찾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반면 선생님들과의 대화와 같은 것은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할애가 적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았다. 시간을 빼앗는 가장 큰 요소는 나 자신의 습관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출근과 동시에 오늘 중으로 꼭 해야 할 3가지를 수첩에 기록하고 체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숲속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큰 나무를 톱으로 열심히 자르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나무꾼이 나무를 자르는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톱날이 엉망이었다. 그래서 나무꾼에게 “톱날이 너무 무디군요. 날을 세워서 하면 작업이 훨씬 수월할 텐데요” 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 나무꾼은 지친 표정으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나무를 잘라야 하니까요.”
그리고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다. 절대적으로 주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은 상대적이고 만들면 만들어진다. 또 허투루 보내는 시간들도 잘 다잡아서 관리하면 시간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매일의 자투리 시간을 모아서 하루에 1시간, 일주일에 1시간, 한 달에 1시간 정도는 나 자신의 실존(實存)을 위한 시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1년, 3년, 10년 후의 그 결과는 또 다른 기적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어 있는 시간을 살리는 기술이며 톱날을 갈아 날을 세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을 살린다는 것은 단순히 열심히 일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살린다는 것은 건져 올린다는 의미이다. 그것도 ‘지금 여기’라는 진리로 건져 올린다는 말이며, 그것이 곧 실존(實存)이다. 그래서 또렷한 체험의 진리로 건져 올린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이가 들수록 세월은 왜 빨리 흐를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부산으로 유학을 왔다. 그 시절은 교통이 좋지 않아 방학 때가 되어야만 고향에 갈 수 있었다. 요즘은 고속도로가 생겨 1시간 30분이면 가는 거리지만 그 당시는 완행버스라 7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아침 7시에 출발하면 오후 2시 30분경이 되어야 고향에 닿았으며 부산으로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방학을 한 다음날은 어김없이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간다. 그런데 그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부산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은 그렇게 빨리 흘러갈 수 없었다. 같은 거리인데도 시간의 경과에 주의를 기울일수록 시간은 길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것은 아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강했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물리학의 법칙을 벗어난 시간의 신비로움은 나이를 먹으면서 새로운 법칙이 추가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느끼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시간은 얼마나 길고 천천히 흘렀던가. 10대에 시속 10㎞, 20대엔 시속 20㎞로 흘렀던 시간이 50대에 이르면 시속 50㎞, 60대엔 시속 60㎞로 점점 빨라진다. 아무리 하루가 24시간이고 시간의 흐름이 언제나 같은 간격이며, 어린 시절과는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이성(理性)은 외치고 있지만, 세월의 가속(加速)은 어쩔 수 없는 시간의 법칙인 것 같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로 한결같은 시간이 왜 나이가 들수록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여기에는 ‘나이가 들수록 혈압, 맥박 등 생체시계 속도가 느려지면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으로 느껴진다’, ‘시간에 대한 개념에는 자신이 살아온 상대적인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즉 10세의 1년과 60세의 1년은 각각 자기 인생의 10분의 1과 60분의 1이기 때문에 그 길이가 다르게 느껴진다’, ‘어린아이들처럼 새로운 경험, 즉 정보량이 많을수록 시간은 더 길게 느껴지고 노인은 그 반대이다’ 등 많은 가설이 있다.
그런데 앞의 두 가지 가설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정보량에 따라 시간 감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또 다른 해결책이 있음을 일러준다. 처음 가보는 길은 멀게 느껴지지만 돌아올 때는 한 번 경험했던 길이라 익숙해져서 갈 때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즉, 어릴 때는 나날이 새롭고 매사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첨벙대며 놀라고 감동하면서 살기 때문에 인상적인 기억으로 하루하루가 생생하다. 하지만 어른의 경험은 매년 반복되는 밋밋한 일상이기 때문에 뚜렷한 느낌도 없이 그저 그런 것으로 시간은 재빨리 흘러간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삶에 변화를 주어 기억할 거리를 만들어 노년을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바꾼다면 시간도 더 길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데코(Adecco)의 창업자인 오모이 도오루는 “나는 올해 예순아홉 살이지만 여전히 도전하고 있다. 아데코를 퇴사한 뒤에 경영 컨설팅 업무를 시작했고, 새로 회사를 설립해 경영자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책 쓰는 일도 하고 있다. 모두가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작한 새로운 도전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이가 들어도 배워야 하고 해야 할 것이 많다. 투병하면서 11년 만에 새 시집을 펴낸 시인 최승자는 “더더욱 못쓰겠다 하기 전에/ 더더욱 써보자/ 무엇을 위하여/ 아무래도 좋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제 변화는 필요 없다고 단언하지 말자. 그리고 지금 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과민반응을 보이지 말며 자주 명상을 하고 항상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열정적인 삶을 살자. 이런 것들이 세월의 속도를 줄일 수 있는 두뇌의 웨이트 트레이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싯다르타
피터 빅셀(Peter Bichsel)은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라는 책에서 시간이 아주 많은, 그것도 내면의 시간이 아주 많고 모든 일에 관대하며 따뜻한 어른, 즉 지혜로운 어른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간이란 어른의 이야기다. 어른의 이야기 속에 시간이 녹아 있다.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는 생활의 지혜와 역사를 견디는 힘이 녹아 있다. 그래서 미래는 어른의 이야기에서 온다. 어른의 이야기를 잘 귀담아 들으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들이 보인다. 어른이란 큰 시간의 흐름을 타고 먼저 흘러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세월의 흐름을 타고 갔다면 그 사람이 어른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세월을 경험하고 시간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또 인생의 주어진 숙제들을 경험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른은 싯다르타와 바수데바처럼 관조하면서 축적한 삶의 경험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물려주는 사람이다.
“자네도 강의 비밀을 깨달았는가?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야.”
바수데바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퍼졌다. “그렇다네, 싯다르타. 자네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강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지. 그 근원에도 하류에도, 폭포에도, 나루터에도, 흐르는 줄기에도, 그리고 강가에는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도 없이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말일세”
“바로 그거야”하고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았고 그것 또한 하나의 강이었네. 어린 싯다르타와 젊은 싯다르타, 그리고 늙은 싯다르타는 실재가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에 의해 분리된 것일 뿐이었지.”
이제 우리는 시인 고은이 올라갈 때 보지 못하고 내려갈 때 본 ‘그 꽃’을 보기 위해 주어진 시간에 대해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내면의 시간을 더욱 많이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