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선거철이 되면 저마다 교육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한다. 교육대통령으로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다. 보릿고개 시절의 교육정책을 21세기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의 교육 전반에 산업화 시대의 기준과 가치를 적용하여서도 안 될 것이다. 역대 대통령의 교육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면서 그간 많은 교육 갈등의 시발이 되곤 했던, 정파적 입장에 따른 기준치와 잣대를 넘어서 보편적 분석틀은 무엇인지 모색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 의무교육과 학제의 기본틀을 세우다
청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구 신학문을 접한 1세대였다. ‘근대성 구현’이라는 시대정신으로 세례를 받은 이승만은 평생 계몽적 지도자로 일관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다음 해에 서둘러 교육법을 제정하며 교육체제 정비에 나선 것도 이러한 의무감 때문이었다. 이 법에서 초등교육 의무화를 선언하여 보편적 민주시민교육의 길을 열었다. 당시 국가 경제 규모로 보면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도자의 의지는 확고하였다.
전쟁 중인 1951년에 학제를 6-3-3-4제로 정비하고, 지방에 국·공립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학제의 기본은 초·중·고를 이수하면 국민 누구에게나 대학 진학의 문이 열려 있는 단선형 학제로 확정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복선형 학제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어 사회적 신분 차이에 의해 일부 학생들은 학령 초기부터 상급교육에의 접근 기회가 분리되었다. 단선형 학제는 박정희 시대의 중·고교 평준화 정책과 더불어 우리나라 평등주의 교육의 근간을 이루었다.
교육자치제 역시 전쟁 중에 도입되었다. 최근 교육감 선출 방식을 둘러싸고 논쟁의 불씨가 커지고 있는 사례에서 보듯 교육자치제는 선진국 수준에서도 운영하기가 쉽지 않은 제도이다. 이 대통령의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소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계몽적 지도자로서 이 대통령의 면모는 문맹퇴치운동에도 드러난다. 보통 독재자라고 하면 우민화 정책을 추진하는데 이 대통령은 오랜 일본 강점기 압제에 의해 ‘우매’하게 된 국민을 깨우치는데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었다. 교육에 있어서 남녀평등주의도 기독교적 평등관, 서구 시민사회를 직접 접한 이 대통령이 아니고서는 당시에 엄두를 내지 못할 앞선 정책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른 건국 대통령이 추진한 교육정책은 재정여건과 제도의 미비로 인해 다분히 선언적 수준에 그친 정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콩나물 교실, ‘우골탑’, 대졸 인력 취업난, 해외 유학파 득세와 학문의 대외 종속성 등의 문제는 제1공화국으로서는 넘기 힘든 시대적 과제였다.
박정희, 산업화 시대 공교육의 기본 구조를 완성하다
이승만 시대의 선언적이고 미완인 교육개혁을 박정희 정권은 짧은 시기에 실질적으로 그 내용을 채워나갔다. 역대 정권 중 가장 많은 제도 변화와 학교 교육의 팽창, 국민 보편교육의 실현이 이루어졌다. 현재의 초·중·고 교육은 박정희 시대의 틀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범학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은 교육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남다른 대통령이었다. 사범학교 출신답게 교사 양성체계를 손질하여 사범학교를 2년제 교육대학으로 바꾸었다. 교원정책에 대해서도 일관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5·16 후 교원노조를 ‘좌경 연공’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는 한편 ‘제자가 스승을 우습게 여기는 교권(敎權) 없는 학원에서 진정한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여 국가가 전 국민을 일정한 수준과 방향으로 계도하고, 새마을운동을 통해 근면·자조·협동하는 의식 개혁을 추진한 이면에는 사범학적인 목민관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5·16 이후 1962년도 시정방침 연설에서 “(국가) 건설기에 적합하도록 교육제도를 쇄신하고 문교정책을 조절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할 것이며 생산 기술 교육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족주의와 실용주의는 박정희 정권이 추구한 교육의 중요 코드였다.
민족주의 교육은 체제 수호를 위한 이념교육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였지만 적어도 정부 차원에서는 서구 교육사조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을 지양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학 연구를 위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인문학 전반에 민족주의적 국가관의 가치를 입혀 국민의 ‘영혼’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가 중심의 인문학과 정책 개발에 참여하는 학자들이 등장하면서 관변학자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실용주의 교육은 국가 산업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박정희 정권은 문·사·철 중심의 문리대 학풍보다는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과학과 이공계 교육에 대한 지원을 국가의 당면한 과제로 인식하였다. 박 대통령은 제3공화국이 출범하자마자 미국 등 선진국에 있는 과학자들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불러들여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R&D 역량의 기반을 다졌다. 자신의 딸(현 박근혜 대통령)을 전자공학과에 입학시킬 정도로 이공계에 대한 관심과 첨단 과학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다. 당시 다른 제3세계 국가 원수의 자제들은 외국어나 정치외교학 등 인문학을 전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용주의적 교육정책의 추진으로 이공계 인력이 대거 양성되면서 전통적으로 인문학을 중시하는 아시아 국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짧은 기간에 이과가 문과를 수적으로 압도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실용주의 교육은 인간자본론과 궤를 같이한다. 김대중 정부 들어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라고 개칭하고 인적 자원의 개발을 국가적으로 천명하였지만,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미 인적 자원 양성을 중시하고, 교육이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적절히 공급하고 나아가 학교에서 배출된 우수한 인력이 산업 발전을 선도하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교육에 접근하였다. 산업현장에 배출된 인력들에 대한 교육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공장학교인 산업체 부설 특별학급을 박 대통령은 직접 방문하여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 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말에는 사립대학의 무분별한 학사 정원관리를 쇄신한다는 취지로 대학 예비고사 제도를 마련하여 대학선발제도를 정비하였다. 대학 입학자격 고사를 도입한 이면에는 박 대통령의 실용주의적 교육관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문을 할 정도의 여건이 안 되는 인력을 고졸 후 산업현장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정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를 비판하는 많은 학자도 ‘중학교 무시험제’와 ‘고교평준화 정책’은 우리나라 교육 역사상 평등교육의 획을 그은 중요한 정책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진보교육감인 서울의 조희연 교육감도 고교평준화 정책은 교육감으로서 완성하고 싶은 정책의 하나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정도이다. 박정희 시대가 아니었으면 관철하기 어려운 정책들이었다.
전두환, ‘정의’로운 학교 교육을 강권하다
전두환 정권은 지도자의 스타일에 걸맞게 전격적인 교육개혁이 이루어졌다. 전 국민이 교육전문가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말도 많고 분파도 많은 교육문제의 얽힌 고리를 단칼에 자르듯이 접근하였다.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은 당시 현직 교사들까지 대거 가세한 과열과외와 막대한 사교육에 기반을 둔 대입 열풍에 대한 정공법적인 해법을 제시하였다.
"…… 과외 수요를 차단하기 위해 다음 해(1981년)부터 대입 본고사를 폐지하고 내신과 예비고사(후에 학력고사)만으로 선발하되 장기적으로는 내신으로만 선발한다. 대입정원을 연차적으로 대폭 늘리되 다음 해 최고 10만5천 명을 늘린다. 졸업정원제를 실시한다. 현직 교사 등의 과외교습을 금지하고 재학생의 학원 수강을 금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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