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공자(3) - 약자를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다

2017.05.01 00:00:00

임건순의 동양의 스승들 - 사상가, 학자 이전에 스승, 교육자였던 사람들의 이야기


고전이란 항상 다르게 읽히는 책

“안평중은 사람 사귀기를 잘하는구나, 사람들이 오래 사귈수록 그를 존경했다.”

공자가 한 재상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안자(晏子)라는 제나라 재상, 정치적 거물이었죠. 안자는 시호 평(平)과 자 중(仲)을 합친 평중이란 말이 이름 대신해 쓰이기도 해 흔히 안평중이라고도 합니다. 그에 대한 공자의 평가가 저랬습니다.

굉장한 칭찬인데 제가 어릴 때는 이 말이 칭찬으로 생각되지 않았어요. 사실 무슨 말인 줄도 몰랐습니다. 너무 뜨뜻미지근해서요. 사마천이 다시 태어나면 안자의 마부라도 되고 싶다고 할 정도로 극찬한 인물이고 당대에 대내외적으로 많은 칭찬과 명예를 누린 사람인데 저렇게 미적지근하게 평가하다니 공자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고 인생살이 경험이 늘어나자 공자의 저 말이 아주 새롭게 와 닿더군요.

그는 오랜 시간 만나고 사귄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답니다. 오랜 시간 만나온 사람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 아닌가요. 외려 장시간 사귈수록 그 사람의 단점과 열등감이나 공격성을 보기 쉽고, 친해졌다는 이유만으로 무례한 언사가 오가기도 하는 게 우리 범인들의 삶인데 말입니다.

어릴 때는 사실 오래 사귄 사람에게 신뢰와 존중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어려운 일일까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래 사귀고 만나온 사람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게 하나의 삶의 화두가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자의 저 말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고전이란 게 그렇습니다. 한번 통독하고 정독했다고 해서 정말 다 읽었다고 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죠. 사회문화, 정치적 조건의 변화, 본인의 성숙과 성장, 세월의 흐름 등 외적 환경 변화에 따라 항상 다르게 읽히고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책이 고전입니다.

동양의 고전이든 서양의 고전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논어가 그러합니다. 자신이 변하고 자신을 둘러싼 조건이 변하면 새롭게 해석되는 부분이 생기고, 특히 무덤덤하게 지나갔던 부분이 매우 절실한 메시지와 가르침으로 다가오지요. 그것이 논어만이 주는 재미이고 맛입니다. 안 그래도 최근에 해석을 크게 달리해서 읽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이 절실한 메시지로 와 닿았는데 바로 위령공편 42장의 말입니다.

악사를 돕는 도리

“시를 배움으로써 학문이 시작되고 예를 배움으로써 제구실을 하는 사람이 되고 음악을 배움으로써 인격이 완성된다.”

공자께서 제나라에 계실 때 소(韶)라는 음악을 들으시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하셨다. 말씀하시길 “음악이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였도다.”

선생께서는 남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그 노래가 마음에 들면 반드시 그것을 반복하여 노래하게 한 다음 함께 노래를 부르셨다.

공자가 음악광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논어와 공자 해석을 보면 예술가로서 공자의 모습을 조명하려고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공자는 정말 노래를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했습니다. 도올 선생님의 묘사와 해석은 무리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음악으로 인격도야가 완성된다 했고, 제나라에서 어떤 음악을 듣자 고기 맛을 잊을 정도였고요, 상대방이 노래를 잘 부른다 싶으면 앙코르를 청하고 나서 같이 부를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공자가 어느 날 어떤 악사분을 모시게 됩니다. 위령공편 42장에 그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맹인인 음악가 사면(師冕)이 방문해왔다. 계단 앞에 이르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계단입니다.” 
좌석 앞에 이르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좌석입니다.” 
모두 각자의 좌석에 착석하자 선생께서 일일이 
“아무개는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개는 저기에 있습니다.” 하면서 소개하셨다.
사면이 돌아가자 자장(子張)이 여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맹인인 분을 응대하는 방법입니까?” 
선생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악사를 도와주는 본래의 자세이니라.”

고대에는 시각장애인이 악사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존에는 이 부분을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을 돕는다고 말하기보다는 악사를 대접하는 방법이라고 독해하는 경우가 많았죠. 워낙에 공자가 음악을 좋아했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서도 음악을 중시했기에 초빙강사로 악사를 모셔왔던 점에 주목하여 악사를 모시는 방법이라고 독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논어와 관련된 책 여러 편을 살펴봤는데 대부분이 악사를 모시는 법에 초점을 둬 해석했더군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공자가 음악을 좋아하고 악사를 존경해 그를 대접하는 방법을 보여줬다고 읽기보다는 장애인인 약자를 대하는 방법을 제자들 앞에서 보여준 것으로 읽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몸소 약자를 존중하는 모습을 교육자로서 보여줬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말로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요.

사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승이든 부모든 교육을 하는 입장이라면 말이죠.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 있고 특히 몸소 보여주며 가르쳐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약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령공편 42장은 바로 그런 공자의 모습이 잘 드러난 장면이고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안연편 22장에서 공자의 수레를 모는 제자 번지가 인(仁)에 관해서 묻자 공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죠. 사람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의 기본은 무엇일까요? 전 약자를 아끼고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기본, 사람됨의 기본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자가 말한 인(仁)이라는 것은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일 테고요. 

그런데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신경 써서 배려하고 존중해야 할 타자는 바로 약자들 아닐까요. 그래서 약자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어짊일 것이고요.

부모라면, 선생이라면 자식 앞에서, 제자 앞에서 어떻게 약자들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도울지 가르쳐야 한다고 보고, 또 직접 행동으로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한국사회는 약자들을 존중하는지. 교육과정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충분히 배우는지 의문이 듭니다. 스스로 저런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보면 한국사회는 약자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기는커녕 사회·문화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잔인한 사회이고 교육과정에서 약자의 존재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기에 위령공편 42장을 저렇게 독해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교육의 주체들이 약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인간됨의 기본이고 사랑의 기본이기에.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커서 저렇게 된다”

저는 이 말만큼 불편하게 느껴지고 잔인하다 싶은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딱한 처지의 형편에 놓인 사람을 보고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자식 앞에서 훈계하는 부모, 그것은 교육의 부정이고 인간됨의 부정이 아닐지요. 어른이 돼서 약자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게 인간됨의 기본이라고 가르쳐야 할 텐데 공부 안 하면 약자가 된다고 하면서 겁을 줍니다. 이건 교육을 포기하는 것이고 또 인간됨을 포기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런 말을 하고 안 하고, 저런 말 속에 담긴 가치관을 가지고 안 가지고 이전에 과연 교육의 주체라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과 교육의 현장에서 약자들을 대하고 존중하는 자세와 태도에 대해서 얼마나 가르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지 않을까 싶습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약자들의 존재, 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보이지 않고 증발된 게 아닌지 그런 생각까지도 해봅니다.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

“오직 어진 자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능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안자에 대한 말, 그리고 악사에 대한 말과 함께 이인편(里仁篇) 4장도 제가 다시 보게 된 부분입니다. 예전에는 그냥 무덤덤하게 넘겼지만 어떤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온 장인데요, 어진 자도 누군가를 미워한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네요.

사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살기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미워하는 대상을 줄이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 제대로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육의 주체라면 그것에 대해 가르칠 수 있어야지 않나 싶습니다. 아이들이 누가 너무 싫고 밉다고 이야기를 할 때 그냥 넘기거나 맞장구를 쳐주는 게 아니라 어떻게 미워하는 사람을 대하고 생각해야 할지 가르쳐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약자를 대하는 자세 못지않게 싫은 사람, 미운 사람,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도 같이 사는 자세도 가르치는 게 교육의 중요한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공자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사람을 미워함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다음 시간에는 그 이야기 좀 해보겠습니다. 

임건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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