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친구처럼 반가운 청미래덩굴

2018.01.02 14:40:00

김민철의 야생화 이야기

늦가을부터 겨울에 산에 오르다 보면 유난히 붉은 열매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청미래덩굴, 찔레꽃 열매를 비롯해 팥배나무, 백당나무 열매 등이 모두 빨간색이다. 이들 열매들이 붉은 것은 사람들 보기 좋으라는 것이 아니라 새들의 눈길을 끌려는 목적이다. 새들이 이 열매를 먹으면 과육은 소화가 되지만 씨는 배설하게 되는데 이런 방식으로 나무 들이 씨를 멀리 퍼트리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청미래덩굴 열매는 전국 어느 산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혹시 이름을 몰랐더라도 지름 1㎝ 정도 크기로 동그랗고 반들반들한 빨간 열매 사진을 보면 많이 본 열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에는 이 청미래덩굴이 나온다.



소설을 읽기 전엔 순이삼촌이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다. 책을 읽어보니 순이삼촌은 화자의 먼 친척인 아주머니였다. 제주도에서는 아저씨, 아주머니를 구분하지 않고,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흔히 ‘삼촌’이라 부른다고 한다.


순이삼촌은 4·3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마을에 학살이 있을 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소설엔 당시 참상이 충격적일 정도로 자세히 나와 있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밤에는 부락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은 자는 반동이라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낮에는 함덕리의 순경들이 스리쿼터를 타고와 도피자 검속을 하니’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고, 할 수 없이 한라산 굴속으로 숨기도 했다. 행방을 모르는 남편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했던 순이삼촌도 따라 올라갔다.


솥도 져나르고 이불도 가져갔다. 밥을 지을 때 연기가 나면 발각될까 봐 연기 안 나는 청미래덩굴로 불을 땠다. 청미래덩굴은 비에도 젖지 않아 땔감으로는 십상이었다. 잠은 밥 짓고 난 잉걸불 위에 굵은 나무때기를 얼기설기 얹어 침상처럼 만들고 그 위에서 잤다.


하필 순이삼촌이 오누이 자식을 데려가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날, 군인들이 갑자기 마을 사람들을 국민학교에 모이라고 했다. 군경 가족만 제외한 다음, 50~60명씩 옴팡밭으로 몰고가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순이삼촌은 이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당시 충격 때문에 신경쇠약 증세를 안고 살다 결국 자살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제주 4·3사건을 처음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로, 1978년에 나왔다. 4·3사건 중에서도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희생자가 많은 ‘북촌사건’을 다루고 있다. 1949년 1월 17일 제주 조천읍 북촌리에서 육지에서 온 군인 2명이 무장대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 한다. 이에 흥분한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모이게 한 다음 소설에서처럼 50~60명 단위로 끌고가 총살한 사건이다. ‘북촌사건’의 현장인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라는 곳에는 소설 ‘순이삼촌’의 문학비와 희생자 위령비를 세워놓은 기념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제주 출신인 현기영은 ‘순이삼촌’ 외에도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 등 제주도 역사와 4·3사건 전후에 발생한 비극에 대한 소설을 주로 썼다.


소설에서 청미래덩굴이 비중 있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비와 군경을 피해 한라산 굴속으로 피신한 ‘도피자’들이 밥을 지을 때 연기를 내지 않기 위해 쓴 나무여서 어느 정도 상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 죄 없는데도 잔뜩 겁을 먹고 주위를 살피며 밥을 짓는 도피자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청미래덩굴처럼 불을 지펴도 연기가 나지 않기로 유명한 나무로 싸리나무가 있고, 때죽나무, 붉나무도 연기가 적게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빨치산 정하섭이 찾아왔을 때 여주인공 소화가 연기가 나지 않도록 싸리나무로 불을 지피는 장면이 나온다. 동학 농민들도 일본군과 관군을 피해 도망다닐 때 청미래덩굴, 싸리나무로 밥을 지었을 것이다.


눈 내린 숲 속을 지켰던, 빨간 열매

청미래덩굴은 어느 숲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어릴 적 고향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한 사나흘 눈이 내리면 새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을 기웃거렸고, 그러면 동네 아이들까지 꿩 몰이를 시작했다. 꿩은 두세 번 몰이를 당하면 기운이 빠져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눈 속에 머리를 박았다. 그걸 덮치면 꿩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낀 꿩이 다시 사력을 다해 날거나 달아나면 허사였다. 꿩을 놓쳤을 때마다 허탈하게 주위를 둘러볼때 눈에 띈 것이 청미래덩굴의 붉은 열매였다. 그래서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나무이고 언제 보아도 고향 친구처럼 반갑다.



빨간 열매가 먹음직스러워 입에 넣으면 맥없이 퍼석퍼석하다. 보기와 다르게 먹을 것은 없는 열매였다. 어릴 적 청미래덩굴 열매가 덜 익어 연두색일 때 먹어보기도 했다. 연두색일 땐 물기가 많지만 신맛이 강해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가 여기저기 사납게 나 있어서 지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생채기가 생길 수 있다.


잎 모양은 둥글둥글한 원형에 가깝지만, 끝이 뾰족하고 반질거린다. 잎겨드랑이에 달리는 덩굴손으로 다른 식물들을 붙잡으며 자란다. 덩굴손이 두 갈래로 갈라져 꼬불거리며 자라는 모습이 귀엽다. 봄에 연한 녹색과 노란색이 섞인 작은 꽃들이 둥그렇게 핀다. 청미래덩굴은 경기도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경상도에서는 망개나무, 전라도에서는 맹감나무 혹은 명감나무라고 불렀다. 그래서 경상도에서는 청미래 잎으로 싸서 찐 떡을 망개떡이라 부른다. 떡장수가 밤에 “망개~떡”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바로 그 떡이다. 망개떡은 청미래덩굴 잎의 향이 배어들면서 상큼한 맛이 나고, 여름에도 잘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경남 의령이 망개떡으로 유명하다.



청미래덩굴과 비슷하게 생긴 식물로 청가시덩굴이 있다. 청가시덩굴도 숲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둘 다 가시가 있고, 잎과 꽃도 비슷하다. 둥글게 휘어지는 나란히 맥을 가진 것도 같다. 그러나 청미래덩굴 잎은 반질거리며 동그란데 비해 청가시덩굴 잎은 계란형에 가깝고 가장자리가 구불거린다. 열매를 보면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청미래 덩굴은 빨간색이지만, 청가시덩굴은 검은색에 가까운 열매가 달린다. 청가시덩굴은 개 체수는 많은데 암수 딴그루이고 수나무들이 많아 열매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청가시덩 굴과 비슷한데, 줄기에 가시가 없는 민청가시덩굴도 있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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