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바람꽃 아씨 오면 봄이 성큼 다가온 것

2018.03.02 09:00:00

연두색 암술, 연한 보라색 수술에다 꽃술 주변을 빙 둘러싼 초록색 깔때기. 변산바람꽃의 특징이다. 2월 중순 전남 여수 향일암 근처는 육지에선 가장 먼저 변산바람꽃이 피는 곳이다. 다래 덩굴을 치우며 자갈밭 샛길을 좀 오르면 만날 수 있다. 낙엽 사이로 올라온 10㎝ 정도 줄기 끝에 하얀 꽃이 하나씩 피어 있다. 곳곳에 두세 송이씩 널려 있고, 십여 송이가 무더기로 피어 있는 곳도 있다.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 ‘변산바람꽃’

변산바람꽃은 복수초와 함께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이다. 일반인에게는 좀 낯설 수 있지만, 야생화에 관심 있는 사람에겐 익숙한 꽃이다. 수줍은 듯 꽃봉오리에 연한 분홍빛이 도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이 이 꽃을 ‘변산 아씨’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꽃은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2~3월에 핀다. 그래서 야생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새해 첫 꽃 산행(山行) 대상은 변산바람꽃인 경우가 많다. 변산 바람꽃 사진을 올리며 새해 첫 ‘알현’의 기쁨을 담은 표현을 덧붙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요즘은 이름이 좀 알려지면 야생화도 금방 수목원이나 공원에서 볼 수 있는데 변산바람꽃은 아직도 산에, 그것도 좀 깊은 산에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꽃이다.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에 바람꽃이 나온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소설을 읽지 않았다. 이순원 스타일을 대략 알기에 그 스타일과 바람꽃이 결합 하면 과연 어떨까 하는 기대를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얼마 전 참지 못하고 소설을 읽고 말았다. 소설은 아주 느린 사랑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죽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젊은 시절 한계령 부근 ‘은비령’이란 곳에서 함께 고시 공부를 하던 친구의 아내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핸드백을 고쳐 매며 휙 하고 머리를 뒤로 젖히는’ 모습이 바람꽃 같은 여자였다. 주인공은 그녀와 만나는 약속 장소로 가다 죽은 친구를 떠올리고 길을 돌려 은비령으로 향하고, 다음날 그녀도 눈길을 헤치고 은비령으로 온다. 은비령 근처엔 바람꽃이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참, 어제 말하던 무슨 꽃이라는 게 이게 아닌?”

은자당 주인은 버섯 한 편에 따로 신문지로 말아둔 들꽃을 펼쳤다. 아직 꽃은 피지않고 꽃대만 올라온 바람꽃이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오늘 낮에 눈 녹는 끝에 석이라도 더러 눈에 띄나 하고 우풍재 쪽으로 갔다가 보고 파왔잔. 그래 무슨 꽃이라고 핸?”

“바람꽃입니다. 전에 군에 있을 때 딱 한 번 봤는데, 나중에 이 사람을 만났을 때 그랬습니다. 이 사람 처음 본 느낌이 이 꽃 같다고.”


죽은 친구 아내라 두 사람의 사랑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사랑 이야기가 바람꽃을 배경으로 느리게 느리게 펼쳐지고 있다. 설악산 한계령 부근에서 피는 바람꽃이라면 변산바람꽃 아니면 너도바람꽃일 것이다. 소설엔 그냥 바람꽃이라고 했는데, ‘여름에 피는 바람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꽃이 구체적으로 변산바람꽃이나 너도바람 꽃으로 표현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냥 바람꽃은 7~8월 설악산 중청휴게소에서 대청봉 오르는 길에서 볼 수 있다. 공룡능선을 배경으로 바람꽃을 담으면 초보자도 거의 작품 수준의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올해 스물다섯 살 생일을 맞은 ‘미스 바람꽃’, 변산바람꽃

변산바람꽃은 1993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신종(新種)이다. 그래서 이 꽃에 대한 신비감도 좀 남아 있다. 여기에다 변산바람꽃이라는 낭만적 이름, 우리나라 특산종이라는 사실까지 아우러져 어느새 초봄을 대표하는 꽃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는 야생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초봄에 반드시 만나고 싶어하는 야생화다. 더구나 비교적 단순한 다른 바람꽃과 달리 꽃 구조도 적당하게 호기심을 자극할 만큼 특이하다. 꽃잎처럼 보이는 하얀 잎 다섯 장은 사실 꽃받침이고, 꽃술 주변을 둘러싼 깔때기 모양 기관 열 개 안팎은 퇴화한 꽃잎이라니 신기할 따름이다.


꽃 이름은 전북 변산반도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해서 붙었다. 옛날엔 식물 조사를 4 월 정도에야 시작했기 때문에 2월에 피기 시작해 3월이면 다 져버리는 변산바람꽃을 잘 몰랐다. 그 후 해안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2월 말이나 3월 초부터는 수리산(경기도 군포) 등 수도권 산에서도 볼 수 있다. 풍도(경기도 안산)에 있는 변산바람꽃은 따로 풍도바람꽃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자라는 지역에 따라 꽃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1993년 전북대 선병윤 교수가 변산바람꽃을 신종으로 발표하자 “놓쳤다”고 아쉬워 하는 식물학자가 많았다. 그즈음 이미 이 꽃의 존재를 알고 있는 학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도 한글에서 “너도바람꽃과 비슷한데 좀 이상하다 생각만 하는 사이에 몇 년이 흘러버렸다. 마음만 있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교훈을 준 풀이기도 하다”고 했다.



바람꽃 종류의 속명(屬名)은 대개 ‘아네모네(Anemone)’인데 그리스어로 ‘바람의 딸’이라는 뜻이다(변산바람꽃은 너도바람꽃속). 바람꽃 종류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가냘프게 흔들린다. 그래서 바람꽃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변산바람꽃 등 바람꽃 종류는 대개 이른 봄에 꽃을 피워 번식을 마치고 주변 나무들의 잎이 나기 전에 광합성을 해서 덩이뿌리에 영양분을 가득 저장하는 생활사를 가졌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가는 부지런한 식물인 것이다. 변산바람꽃을 시작으로 너도바람꽃, 꽃대 하나에 여러 송이가 달리는 만주바람꽃, 비교적 꽃이 큰 꿩의바람꽃, 꽃대에 한 송이만 피는 홀아비바람꽃, 꽃이 노란 회리바람꽃 등이 봄에 피고, 8월에 설악산에서 피는 그냥 바람꽃까지 우리나라에 바람꽃은 10여 종이 있다. 이 중 변산바람꽃이 제일 예쁘다는 사람이 많다. 변산바람꽃이 ‘미스 바람꽃’인 셈이다. 이처럼 신종 등록 을 생일로 치면 올해 스물다섯 살인 변산바람꽃은 꽃도 예쁘고 스토리도 많다. 대개 변산바람꽃과 세트로 등장하는 꽃이 복수초(福壽草)다. 피는 시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향일암 일대에서도 유난히 크고 선명한 복수초를 볼 수 있다. 눈이 내렸을 때 피어 있는 복수초는 야생화 마니아들이 꼭 한번 사진에 담고 싶은 장면이다. 변산바람꽃이 피면 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이제부터 추위는 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라고 할 수 있다. 변산바람꽃을 시작으로 올해도 펼쳐질 야생화 향연을 생각하니 가슴설렌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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