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꽃이 토종, 나팔꽃은 귀화종

2018.07.02 09:00:00

공지영의 장편소설 <봉순이 언니>는 대여섯 살 먹은 주인공 짱아가 식모인 봉순이 언니를 보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1960년대 서울 아현동이 배경이다. 봉순이 언니의 삶은 기구하다. 예닐곱 살 무렵에 의붓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하고 가출해 고아원에서 잠시 지냈다. 그리고 교회 집사 집에서 학대 당하다가 열 한두 살부터 짱아네 집 식모로 살고 있다. 봉순이 언니는 ‘느려터지고 손재주도 없지만 억척스레 일도 잘하고 순한’ 언니였다. 더구나 짱아에게는 자주 귀신 이야기를 해주고, 울면 달래주고, 같은 방을 쓰면서 잠자리 베개를 고쳐놓아 주는 착한 언니였다.


그런데 어느 날 짱아 어머니의 다이아반지가 사라지자 봉순이 언니가 누명 을 쓴다. 견디다 못한 봉순이 언니는 동네 세탁소 청년과 도망쳤다. 오해가 풀렸을 때는 청년에게 버림받고 아이까지 가진 채 돌아온다. 그리고 짱아 어머니의 강요로 아이를 지우고, 30대 홀아비와 결혼해 아이를 낳지만 곧 남편과 사별한다. 봉순이 언니 인생은 이처럼 한 번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끊임없이 불행을 반복한다. 그러나 봉순이 언니는 그냥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어떠한 불행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낙관적인 성격을 가졌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도 주인공이 전철에서 ‘아직도 버리지 않은 희망’을 담은 눈빛을 가진 여자(봉순이 언니인 듯)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다.



봉순이 언니를 닮은 나팔꽃

이 소설에서 가장 상징적인 꽃을 찾는다면 무엇일까? 이 소설에는 여러 꽃들이 나 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게 했다. 채송화는 ‘내 고향 채송화 꽃 핀 서울의 한 귀퉁이에는 나와 봉순이 언니가 있었다’와 같은 대목 말고도, 책 표지에 ‘채송화 꽃 핀 서울의 한 귀퉁이 풍경을 세밀화처럼 그려내는 놀라운 기억력!’이라는 광고 카피에도 등장해 나를 유혹했다.


봉숭아꽃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봉순이 언니와 이름이 비슷한 데다, 봉순이 언니가 30대 홀아비와 결혼을 앞두고 얼굴이 피어날 때 “아이고 우리 봉순이가 피니까 정말 봉숭아꽃 같구나”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여기에다 봉순이 언니가 주인공인 ‘짱아’ 를 무릎에 앉히고 손톱이랑 발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는 장면도 있다. 고민 끝에 나는 나팔꽃을 선택하기로 했다. 봉순이 언니가 다이아반지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우는 날, ‘아침에 피었다 시든 나팔꽃의 진자줏빛 꽃 이파리’가 안개에 휩 싸인 듯 뿌예졌다는 대목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음 장면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싫어요! 싫어요! 놔! 놓으란 말이야.”

꽃밭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담을 따라 시든 나팔꽃의 꽃씨를 받던 나는 그만 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중략) 나는 봉순이 언니가 어머니에게 행하는 집요한 저항의 몸 짓을 뒤통수로 느끼면서 까만 씨를 받아내 원피스의 앞주머니에 넣었다. 통통하던 나 팔꽃 이파리와 꽃잎들은 이제 말라버렸다. 하지만 이 눈동자처럼 검은 씨앗이 내년 봄에는 다시 담장 따라 피어나리라. 아침마 다 이슬을 머금은 그 황홀한 보랏빛. 열세 개, 열네 개, 열 다섯 개…. 봉순이 언니의 울 부짖는 소리, 나팔꽃 씨를 세는 내 눈에서 하지만 자꾸 눈물이 솟고 있었다.


주인공 어머니가 애 지우러 가자고 하자 봉순이 언니가 저항하는 장면으로, 이 소설 에서 가장 긴장감이 팽팽하고 안타까움을 주는 대목이다. 또 봉순이 언니의 성격과 처한 상황 등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시든 나팔꽃’, 그러나 내년 봄에는 다시 담장 따라 피어날 나팔꽃은 자주 시들지만 다시 피어나고야마는 봉순이 언니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메꽃은 오래 전부터 이 땅에 살아와

나팔꽃과 비슷하게 생겨 많은 사람들이 나팔꽃으로 착각하는 꽃이 메꽃이다. 사람들이 메꽃보다 나팔꽃을 더 잘 알지만 메꽃이 더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온 원조 우리 꽃이다. 나 팔꽃은 인도가 원산지인 귀화식물이다. 메꽃은 심지 않아도, 가꾸지 않아도, 보아주지 않아도 길가나 들판에서 저절로 자라서 꽃을 피운다. 꽃 색깔도 연한 분홍색이라 은근해서 좋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나팔꽃보다 메꽃이 더 봉순이 언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2003년쯤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인시대’라는 TV 사극이 있었다. 극중에서 이 의방의 처가 옆집으로 쌀을 얻으러 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담장에는 나팔꽃이 피어 있었다. 나팔꽃은 수백 년 전 우리나라에 귀화한 식물이기 때문에 고려 중기에는 이 땅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팔꽃은 메꽃과 덩굴성 식물로, 화단이나 담장 근처 등에 심어 가꾸는 꽃이다. 가요 가사에도 나오듯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꽃잎을 오므린다. 햇빛을 좋아하므로 양지바른 곳에 막대 등을 설치하면 잘 감고 올라간다. 꽃 색깔은 주로 빨간색 또는 짙은 보라색이다. 생명력과 씨앗의 발아력이 아주 강한 식물이라 꽃씨를 받아 뿌리면 다음 해 봄 거의 어김없이 나팔꽃이 올라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유종인 메꽃은 연한 분홍색이다. 나팔꽃과 메꽃은 꽃 색깔뿐만 아니라 잎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나팔꽃 잎은 심장 모양이 3개로 갈라지는 형태다. 메꽃 잎은 창과 같이 생긴 긴 타원형이고 끝이 뾰족하다. 또 나팔꽃은 한해살이풀이지만 메꽃은 여러해살이풀이다. 즉, 나팔꽃은 씨를 뿌려야 나지만 메꽃은 씨를 뿌리지 않아도 봄이면 뿌리줄기에서 새싹이 올라오는 것이다. 메꽃의 뿌리를 ‘메’라고 하는데, 전분이 풍부해 기근이 들 때 구황식품으로 이용했다.


나팔꽃과 비슷하지만, 3개로 갈라진 잎이 아주 깊게 파인 미국나팔꽃, 잎이 파이지 않고 그냥 심장 모양인 둥근잎나팔꽃도 있다. 또 메꽃과 비슷한 꽃으로, 바닷가에 피는 갯메꽃이 있다. 메꽃처럼 같은 연분홍 꽃을 피우는데 잎은 둥근 하트 모양이다. 10여 년 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취재하러 금강산에 갔을 때 해금강호텔 옆 허름한 해안에서 막 올라오기 시작한 갯메꽃 무리를 보았다. 아직 작은 개체였지만 잎이 둥근 하트 모양인 것이 영락없는 갯메꽃이었다. 마침 집에서 메꽃을 키우고 있어서 옆에 심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무리 지어 자라서 한 뿌리 캐와도 아무 지장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나같이 생각하면 금방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꾹 참았다. 야생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제1 철칙은 야생화를 있는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이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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