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리, 그리운 고향의 열매

2018.09.03 09:00:00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장 자극하는 식물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서는 꽈리가 수억만리 이국땅으로 유학을 간 주인공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자극하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언젠가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알지 못하는 집 앞에 섰다. 그 집 정원에는 한 포기 꽈리가 서 있었고 그 열매는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그처럼 많이 봤고, 또 어릴 때 즐겨 갖고 놀았던 이 열매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였던지. 나에겐 마치 고향의 일부분이 내 앞에 현실적으로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오랫 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 집에서 어떤 부인이 나오더니 왜 그렇게 서 있는지 물었다. 나는 가능한 한 나의 소년 시절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그 부인은 꽈리를 한 가지 꺾어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얼마 후에 눈이 왔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성벽에 흰 눈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흰 눈에서 행복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 고향 마을과 송림만에 휘날리던 눈과 같았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대목은 주인공이 혹시나 고향에서 편지가 왔는지 확인하러 우체국에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에 꽈리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눈이 온 날 주인공은 지난 가을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다가 갑자기 별세했다는 맏누이의 편지를, 고향에서의 첫 소식으로 받는다. 이 소설은 나라가 망해가는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의 추억, 그리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도착하기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간결하고 담담한 문체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다. 특히 어린 시절과 역사적인 사건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한 인간이 성숙해가는 과정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그려져 있다.

 

주인공은 ‘유리창이 있는’ 신식 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을 접하며 유럽에 대한 동경심을 갖는다. 그리고 서울의 의학 전문학교에 다니다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했다. 그는 지하로 잠복한 학생운동에서 삐라(전단)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3·1운동의 결과로 일본은 언론의 자유 선포 등 유화정책을 폈지만 3·1운동 가담자들을 체포해 중형을 가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 쫓기자 어머니는 독일 유학을 권했다.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겠다. 비록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 마라. 너는 나의 생활에 많고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자! 내 아들아, 이젠 너 혼자 가거라.”

 

작가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상하이, 싱가포르, 콜롬보, 수에즈 운하를 거쳐 프랑스 마르세유항에 도착했다. 이어 다시 기차를 몇 번 갈아탄 끝에 중부 독일의 작은 도시에 도착하는 내용이다. 원래 독일어로 쓴 책인데, 전혜린이 서울 법대에 다니다 독일 유학 중 이 책을 접하고 1959년 우리말로 번역했다. 전혜린은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유명하다. 그는 ‘역자 후기’에서 “유창하고 활달한 문체며 그 아름다운 운율이며 그 깊은 영혼을 재현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인 줄 알았으나, 우선 한국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으로 시도해본 것”이라고 했다.

 

꽈리는 가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은 노란색을 띤 흰색인데, 가을이면 부푼 오렌지색 껍질 속에 열매가 있는 꽈리가 꽃보다 더 예쁘게 달린다. 이 껍질은 꽃받침이 점점 자라는 것으로, 풍선 모양으로 열매를 감싸는 특이한 형태다. 마을 부근 길가나 빈터에서 자라며 일부러 심기도 한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이 1.5cm 정도로 빨갛게 익으면 먹을 수 있다. 이 열매는 옛날에 어린이들의 좋은 놀잇감이었다. 잘 익은 꽈리열매를 손으로 주물러 말랑말랑하게 만든 다음 바늘이나 성냥개비로 꼭지를 찔러서 속에 가득찬 씨를 뽑아낸다. 속이 빈 꽈리열매에 바람을 불어넣은 다음 입에 넣고 혀와 이와 잇몸으로 가볍게 누른다. 그러면 ‘꽈르르 꽈르르’ 소리가 난다. 특히 많이 불면 보조개가 생긴다고 해서 극성스럽게 부는 아가씨들도 있었단다. 그러나 이 꽈리 소리는 마치 뱀 이 개구리를 잡아먹을 때 나는 소리와 흡사하다 하여 어른들은 꽈리를 불면 뱀이 나온다고 집에서는 불지 못하게 했다.

 

박완서의 단편 <그 여자네 집>에서는 꽈리가 연인을 지키는 ‘꼬마 파수꾼의 초롱불’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같은 제목의 김용택 시인의 시를 모티브로 일제의 징병, 위안부 모집, 그리고 남북분단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만득이와 곱단이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두 사람이 예쁜 사랑을 할 무렵, 만득이가 곱단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꽈리가 나온다.

 

곱단이는 나에게 가끔 만득이가 보낸 편지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중 아직도 생각나는 것은 곱단이네 울타리 밑의 꽈리나무를 ‘꼬마 파수꾼들이 초롱 불을 빨갛게 켜들고 서있는 것 같다’고 표현한 거였다. 당시 우리 동네 집들은 거의 다 개나리로 뒤란 울타리를 치고 살았다. 그리고 뉘 집이나 울타리 밑에서 꽈리가 자생했다. 봄에서 여름에 걸쳐서는 거기에 꽈리나무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전혀 눈에 안 띄는 잡초나 다름없었다. 꽈리가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풀숲이 누렇게 생기를 잃고 난 후였다. 익은 꽈리는 단풍보다 고왔고, 아닌게 아니라 초롱처럼 앙증맞았다. 그러나 그맘때면 붉게 물든 감잎도 더 고운 감한테 자리를 내주고, 들에서는 고추가 다홍빛으로 물들 때였다. 꽈리란 심심한 계집애들이 더러 입안에서 뽀드득대는 것 외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하찮은 잡초에 불과했다. 우리집 울타리 밑에도 꽈리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흔해빠진 꽈리 중 곱단이네 꽈리만이 초롱에 불켜든 꼬마 파수꾼이 된 것 이다.

 

박완서가 약간의 질투를 섞어 곱단이를 부러워하는 것이 보이는가. 어릴 적 시골에 흔했던 꽈리가 누구에게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매개로, 누구에게는 연인을 그리는 사랑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박완서는 <그 여자네 집> 말고도 자신의 연애담을 담은 장편 <그 남자네 집>도 썼다. 박완서의 고향은 개성 옆 개풍군으로, 이미륵의 고향 해주와 멀지 않다. 둘 다 고향에 얽힌 글에 꽈리를 담은 것은 단순히 우연인지 아닌지 궁금하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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