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동행] 사랑의 온도

2019.06.17 10:14:00

사람은 항온동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는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특정한 온도를 띠고 있는 것을 체온이라고 한다. 

 

더 큰 사랑은 결국 내 아이만을 위해 퍼붓는 사랑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에 대해,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물감이 번지듯 뭉게뭉게 밤꽃이 피어날 즈음 작은 시골 중학교 주변의 논은 모심기가 절정이다. 어린 모들은 무논에 서툰 행렬로 힘겹게 디디고 서서 자세를 곧추고 있고, 그 사이로 개구리 울음소리가 물장구를 치는 아름다운 유월이다.

 

운동장을 달리는 아이들의 이마에 쏟아지는 땀방울이 보석처럼 빛나고, 교실 문을 열면 수많은 꽃이 나를 향해 핀다. 저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혼자만의 사랑이 홍역처럼 번지는 계절을 맞는다.

 

하지만 이렇게 교사의 사랑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초임 시절 넘치는 사랑으로 학생들에게 무엇이나 주고 싶었다. 수업시간이면 초콜릿이나 사탕을 가지고 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저 많이 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기대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수업시간마다 사탕을 달라고 떼쓰는 아이들의 요구에 참 난감하였다. 약간의 보상은 학생들에게 상승효과를 주지만 적정선을 넘어설 때는 문제가 생긴다.

 

.오래전 일이다. 노루처럼 맑은 눈을 가진 가난한 여학생은 어머니의 가출과 아버지의 낙담으로 인해 도시락을 제대로 싸 오지 못하였다. 그 시절에는 학교급식이 이루어지지 않아 점심시간이면 운동장 주위를 몰래 배회하곤 하였다. 이것을 알아챈 체육 선생님께서 몰래 도시락을 싸주시기 시작하셨다. 다른 아이들이 혹시 알까 봐 도시락을 몰래 숨겨두면 아이가 쉬는 시간에 가져가곤 하였다. 같이 근무하는 교사들도 몰랐고 급우들도 알지 못했다. 이 선행은 여학생의 동생이 들어와도 계속되었다.

 

내가 우연히 쉬는 시간에 학생이 사물함에서 도시락을 꺼내는 것을 보고 짐작할 뿐이었다. 이 두 학생의 수학여행비며 소풍비도 모두 선생님께서 대납하셨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배려로 건강하고 무사히 졸업했다. 도시락을 싸 주신 선생님께서는 작년에 퇴직하셨다.

 

며칠 전 퇴직하신 선생님을 뵈러 갈 기회가 있어서 이야기 끝에 예전에 도시락을 싸 준 학생의 안부를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졸업 후 몇 번의 전화와 편지를 받았고 지금은 소식이 끊어졌다고 하셨다. 자신은 괜찮았지만 새벽마다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준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기억나지 않는 제자 두어 명이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담임한 것도 아니고 수업시간에 두각을 드러내지도 않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제자는 “선생님께서 중학교 시절 제게 하신 말씀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하면서 스승의 날이면 감사 인사를 한다고 한다. 솔직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일로 힘들어하는 학생에게 평범한 격려의 말을 하신 것 같다고 한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은 그 학생의 행동이 나 역시 좀 섭섭하였다. 그런데 이 학생의 행동이 얼마 전 한 의사의 글을 읽고 문득 이해가 되었다. 그분은 최선을 다해 살려낸 환자는 잘 찾아오지 않고, 잘 기억에 남지 않는 환자가 오히려 감사하면서 자주 다녀간다고 왜 그럴까 궁금해서 존경하는 어른께 질문을 드렸더니 그분은 명쾌하게 이런 답변을 해 주셨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받을 수 있는 만큼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 그 사랑은 끝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과도하고 신세를 지게 되면 자존심이 상하고, 신세를 갚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떠나게 됩니다.”

 

아마 매일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받은 그 학생은 과도하게 받은 선생님 사랑이 늘 죄스럽고 갚을 수 없음이 마음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늘 마음은 있지만 그 사랑에 답할 만큼 더 멋진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사람은 과도하게 신세를 지면 자연스럽게 그 곁에 머물기 어렵다고 한다. 

 

사람은 항온동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는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특정한 온도를 띠고 있는 것을 체온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체온이 39도 이상 올라가게 되면 즉시 두통과 어지러움 증상이 나타날 수 있고 체온이 1도 내려가게 되면 떨림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체온은 42도까지 올라가면 죽음을 당할 수 있고 반대로 32도까지 내려오면 저체온증으로 사망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사랑의 온도는 몇도일까? 그것의 적정선은 체온에 비할 수 있다. 적정선을 넘어설 경우 그 사랑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얼마 전 일어났던 사건 생각난다. 교사인 아버지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자식에게 지나친 사랑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여 회자인구(膾炙人口)하였다. 부모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자식을 위해서만 희생하는 사랑은 이미 그 적정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교육현장에서도 학생을 위해 넘치는 사랑만을 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학생들이 이 대지에 두 발로 서서 스스로의 힘으로 뿌리내릴 수 있게 도와야하지 않을까?

 

인생의 험난한 길을 걸어온 부모나 스승은 안타까운 마음에서 조금 더 쉬운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셋방살이의 설움을 뼛속까지 느낀 부모라면 내 아이의 시작은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해서 편안한 출발을 원할 것이다.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뿌리내리지 못한 삶은 조그만 바람에도 무너지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내 새끼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국 더 큰 사랑의 방법은 내 아이만을 위해 퍼붓는 사랑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에 대해, 이웃에 대해, 내 아이와 함께 살아갈 모든 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새들은 춥고 힘든 겨울밤, 옹기종기 모여앉아 체온을 부비며 견딘다. 이처럼 내 아이들이 함께 살아갈 그 존재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넓고 크게 도와주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굶고 있는 그 아이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이 결국 내 아이의 체온을 지키는 것이다.

 

뜨거운 햇볕에 데워진 무논에 어린모가 제법 꼿꼿하게 머리를 세운다. 이들은 제힘으로 천천히 그리고 쉬지 않고 자라날 것이다. 이제 바람과 햇살과 비가 그들을 키우리라. 우리의 아이들도 비와 바람과 햇살이 그들을 키우고 힘들게 하고 그러면서 이 대지에 우뚝 설 것이다.

 

앞산에 핀 밤꽃 내음 무논을 건너 교무실 창 앞에 매달린다. 그 사이로 아이들의 눈부신 웃음이 빛나는 꽃이 되어 피어난다. 강마을에 첫여름이 성큼 다가선다.

이선애 경남 지정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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