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을 바탕화면으로 깐 아이

2019.07.05 10:30:00

김애란의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은 남들보다 빨리 늙는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열일곱살 남자아이 아름이가 투병하는 이야기다. 여기에 열일곱에 애를 낳아 지금은 서른네살인 어린 부모가 아름이를 돌보며 성숙해가는 이야기, 아름이가 역시 불치병에 걸린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이메일을 주고받는 이야기가 주요 줄거리다.

 

소설 속에서 주요 상징 또는 소재로 나오는 꽃을 찾아 그 꽃이 소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 꽃은 어떤 꽃인지 소개하는 것이 필자의 주 관심사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출간 당시 인기 소설이어서 샀더니, 중학생 딸이 먼저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읽으면서 꽃이 나오는지 잘 살펴달라”고 했다. 딸은 다 읽고 나더니 “나오는 꽃이 없다”고 했다. 그다음은 아내가 읽었는데 읽고 나서 역시 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필자가 읽어보니 도라지꽃이 주인공 아름이와 여자친구의 우정 또는 사랑의 상징으로 선명하게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줄거리에 집중해 읽느라 도라지꽃이 나오는 것을 놓친 듯했다.

 

도라지꽃을 닮은 소녀

이 소설에서 도라지꽃은 두 번 나온다. 집안 형편상 더이상 병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자 아름이는 성금 모금을 위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을 자청한다. 이를 계기로 골수암에 걸린 동갑내기 소녀 서하와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아름이는 이를 통해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어가고,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설렘을 느끼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서하와 주고받은 메일들은 너무 예쁘면서도 가슴을 아릿하게 만든다. 어느날, 서하는 아름이에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낸다.

 

요 며칠 아빠랑 절에 있었어.

아빠가 요새 대체요법에 관심이 많거든.

근데 거기 스님이 나더러 도라지꽃같이 생겼다고 하더라.

 

서하는 어떻게 생겼기에 스님이 도라지꽃 같다고 했을까. 아름이는 이 도라지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얼마 후 다큐멘터리 PD 승찬 아저씨가 문병을 왔을 때 노트북을 켜둔 아름이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근데 넌 바탕화면이 그게 뭐냐.”

“뭐가요?”

“걸그룹도 많은데 웬 도라지꽃이니. 늙은이같이.”

“왜요, 뭐가 어때서요?”

 

도라지꽃을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 정도로 오매불망 서하 생각을 한 것이다. 도라지꽃이 다시 한번 둘 사이의 우정 또는 사랑의 상징으로 선명하게 드러나기를 바라며 책을 읽었으나 작가는 더 이상 이 꽃을 등장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도라지꽃은 아름이가 유일하게 비밀을 나눈 아이, ‘첫사랑, 혹은 마지막 사랑’이었던 서하를 그리워할 때 등장한 꽃이어서 이 소설을 대표하는 꽃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심심산천에’ 피는 도라지는 초롱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나라 전국의 산에서 볼 수 있는 식물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도라지꽃은 밭에 재배하는 것으로, 나물로 먹는 것은 도라지 뿌리다. 보통 40~100㎝ 자라고 잎이나 줄기를 자르면 흰 유액이 나온다. 흰색 또는 보라색으로 피는데, 흰색과 보라색 사이에 중간색 같은 교잡이 없다는 것도 특이하다.

 

별처럼 다섯 갈래로 갈라진 통꽃이 기품이 있으면서도 아름답다. 문일평은 꽃이야기 책 <화하만필(花下漫筆·꽃밭 속의 생각)>에서 “도라지꽃으로 말하자면 잎과 꽃의 자태가 모두 청초하면서도 어여쁘기만 하다”며 “다른 꽃에 비해 고요히 고립을 지키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적막한 빈산에 수도하는 여승이 혼자 서서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밭에서 피어나는 ‘별’을 닮은 꽃

도라지꽃을 별에 비유하는 글들이 많은데, 가만히 보면 도라지꽃에는 세 개의 별이 있다. 먼저 꽃이 벌어지기 직전, 오각형 꽃봉오리가 별 같이 생겼다. 도라지꽃은 개화 직전 누가 바람을 불어넣는 풍선처럼 오각형으로 부풀어 오른다. 이때 손으로 꾹 누르면 ‘폭’ 또는 '펑'하는 소리가 나면서 꽃이 터져 어릴적 재미있는 놀이거리 중 하나였다.

 

두 번째로, 꽃잎이 활짝 펼쳐지면 통으로 붙어 있지만 다섯 갈래로 갈라진 것이 영락없는 별 모양이다. 그런데 꽃이 벌어지고 나면 꽃잎 안에 또 별이 있다. 꽃 안쪽에 조그만 암술머리가 다섯 갈래 별모양으로 갈라진 채 뾰족이 내밀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에 오각형의 풍선처럼 부풀다가 다섯 갈래로 갈라진 통꽃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피어난다. 고주환 씨는 책 <나무가 청춘이다>에서 도라지꽃이 옆으로 ‘돌리며’ 피어나는 것이 이름의 유래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도라지꽃이 개화하기 직전,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가 산처녀의 봉긋한 가슴 같다는 사람도 있지만, 서양 사람들한테는 이게 풍선처럼 보인 모양이다. 그래서 도라지의 영어 이름은 ‘Balloon flower(풍선꽃)’다. 도라지꽃이 필 때 수술 꽃가루가 먼저 터져 날아간 다음에야 암술이 고개를 내미는데, 자기꽃가루받이를 피하기 위한 전략이다.

 

아름이는 자신으로 인해 잃어버린 부모의 청춘을 돌려주고 싶다. 그래서 부모의 만남과 사랑부터 자신이 태어날 때까지 이야기를 글로 써서 부모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고 있다. 이메일을 주고받은 서하가 누구인지에 대한 반전이 있다. 꽃과 식물에 관심을 갖고 소설을 읽다 보니 다음과 같은 문장도 좋았다.

 

어디선가 까르르 박꽃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돌아보니 젊은 레지던트 하나가 간호사들에게 농담을 걸고 있었다. 나는 내 속 단어장에서 ‘추파’라는 낱말을 꺼내 만져보았다. 가을 추, 물결 파. 가을 물결.

나이 많은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수천장의 잎사귀를 나부끼며 고독하고 풍요롭게.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게로, 그 나무가 또 건너 나무에게로, 쉼 없이, 은근하게. 그러고 봄 추파는 사람만 보내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두근두근 내인생>은 김애란의 첫 장편이다. 김애란은 특유의 젊은 감각, 신선한 문체와 스토리로 문단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작가다. 그의 글은 발랄하고 재미있다. <두근두근 내 인생> 곳곳에도 읽다가 절로 웃음이 나오는 구절이 많다. ‘엉뚱한 듯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문장이 흡인력 있다. ‘슬픈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경쾌하게 풀어내는 작가’라는데, <두근두근 내 인생>에 딱 맞는 평인 것 같다. 이 소설에서도 아름이의 희망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자식이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라고 했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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