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말을 안다는 것’을 안다는 것

2019.09.04 10:30:00

 

01

내가 자란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바깥세상 물정조차도 돌아앉은 산골이었다. 그런지라 세상 말도 더디게 배웠다. 6·25전쟁 후 세상은 궁핍으로 가득 채워진 듯했다. 가난 속에서는 ‘듣고 배울 말’도 궁핍했다. TV는 아예 존재하지를 않았고, 라디오 방송도 수신 자체가 불가능했으니, 밖으로부터 들을 말이 없었다. 결핍 속에서는 ‘읽어서 배울 말’도 부족했다. 읽을 책이 없었다. ‘읽어서 배우는 말’이 산골 아이에게는 다가오지를 않았다. 그저 식구들 언어만 접할 뿐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이른바 사회화된 말, 또는 문화적으로 진화된 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런 게 내 습득의 마당 안으로 들어오지를 못했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대여섯 살짜리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이다. “우리 마을 대식이 아재가 대학에 떨어졌다.” 어린 나는 이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학이 높은 수준의 학교라는 것은 대충 알겠는데, 떨어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마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데에 있는 학교일 수 있겠지.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 학교라면 경사가 심해서 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대학의 문 앞에는 큰 낭떠러지가 있어서 그걸 떨어지지 않고 기어 올라가야 대학생으로 받아준다는 말인가. 여섯 살짜리 나의 추리는 그런 수준이었다.

 

표현된 말과 그것이 진짜로 나타내는 뜻 사이의 틈새를 내 소견머리로는 메꿀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말로만 들어서는 그게 어떤 사태인지, 어떤 형용인지, 도무지 어림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말을 맹탕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아는 듯하면서도 모르는 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 말의 현장’을 꼭 내 눈으로 가서 보고 싶었다. 그래야 그 말이 이해될 성싶었다.

 

여섯 살 나는 ‘떨어지다’라는 말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알고 있다고 믿었다). 나 자신이 마루에서 떨어져 보았고, 나무에서 떨어져 다쳐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떨어진다는 말을 나처럼 경험해 본 사람도 없을 거라고,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떨어지다!’ 이 말을 내가 알고 있음을 나는 굳게 믿었다. 그런데 서울 가서 대학 시험을 치고 떨어져 마을로 돌아온 대식이 아재를 보는 순간 나는 혼돈에 빠졌다. 대식이 아재는 멀쩡했다. 떨어져서 다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걷고 뛰는 것도 정상이었다. 내가 아는 ‘떨어지다’라는 말은 이제 더 나아갈 길을 잃었다. 나는 ‘떨어지다’가 추상화되거나 비유적으로 쓰이는 걸 알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이 말을 내가 확실히 안다고 나를 믿는 순간, 오로지 내가 아는 뜻으로만 이 말을 이해하려 드는 것이다. 이는 유아적 사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확증 편향(確證偏向)’의 징후들이 만연해 있다. 자신의 가치관·신념·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성향이나 사고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자신의 선입견을 확실히 증명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탐색하려는 경향이 늘어난다. 반대로 자신이 믿는 바에 반하는 정보들에 대해서는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되려 마주하게 되어도 외면한다(위키백과). 가치 갈등이나 이념 갈등이 점점 극단화하면서 생겨나는 닫힌 사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것만 정당하고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다. 내가 모를 수도 있다는 점은 애초에 차단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일말의 용서도 없다. 용서는커녕 마음속으로는 ‘학살 심리’ 비슷한 상태를 견지하는 것이다. 인터넷 안의 시국 이슈에 달린 네티즌들의 댓글들이 이를 웅변으로 입증한다. ‘대학에 떨어졌다’라는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대여섯 살 무렵 나의 사고 패턴과 유사하지 않은가. 어떤 말을 이해하거나 사용할 때, 오로지 내가 아는 의미 범주로만 그 말을 이해하려 하고, 그 뜻을 믿으려 하는 태도가 바로 확증 편향 아니겠는가. 확증 편향을 가지고 상대를 무조건 무시하는 사람은 ‘어른’이 아니다. 즉, 성숙한 사람이 아니다. 앎이나 생각이 자라나지 못한 어린아이의 사고와 다를 바 없다. 확증 편향의 사람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확증 편향의 일종일까. 그런 딜레마에 우리 사회가 빠져 있다.

 

02

어린 내가 의문을 품었던 말이 하나 더 있다. 교회에서 자주 쓰는 말이었다. 예배에서 헌금을 드리는 순서가 되면, 목사님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시간입니다”라고 했다. 또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기”를 기도하곤 했다. “이 헌금이 온전히 하늘나라를 위해 쓰이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여섯 살짜리 아이는 이런 말들을 모순 없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일차원의 세계에서 이런 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초월적이고 초능력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는 있어도, 의미의 자물쇠를 풀고, 스스로 의문 없이 온전한 이해를 하기에는 이런 말들이 신비해서 어려웠다. 아니 어려워서 신비했다.

 

소년의 궁금증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헌금을 받아 가실 하나님이 교회에 언제 오시는가. 어떤 방법으로 받아 가시는지가 참으로 궁금했다. 헌금을 전달하는 분은 목사님인가. 아니면 하나님 스스로 가져가시는 건가. 기쁘게 받아주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분은 기쁜 마음을 어떻게 표정에 드러내실까. 그리고 이 헌금한 돈은 이 지상에 있지 않고 정말 하늘나라에 보관하는 것일까. 하늘나라로 헌금을 옮길 때는 비행기로 옮기는 것인가. 구름 타고 옮기는 것인가. 하늘나라 어디에 보관하는 것일까. 하늘나라에서 돈 쓸 일은 어떤 일이 있단 말인가. 등등이 나의 관심사이었다. 나의 의문과 관심사는 그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왠지 이런 질문은 어른들에게 면박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금과 관련해서 교회가 사용하는 말은, 그 말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자면, 상당히 오랜 기간 영성의 수련과 학습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회의 관습과 풍속도 알아야 하고, 신을 언어로 섬기는 제도로서의 언어도 이해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성서적 해석의 오랜 전통과 그것을 개인의 신앙 체계 속에서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헌금과 관련된 교회의 언어에 대한 궁금증을 어른들에게 물었을 때, ‘지금 설명해도 아직은 잘 모를 것이다. 차차 너도 자라면서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점점 자라나면 자연스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런 대답을 듣곤 했다. 대답의 공통점은, 말을 이해라는 데는 시간이 상당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자라는 동안 무신론자가 된 사람은 이 어릴 적 헌금의 언어들이 말 그대로의 사실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으리라. 어른이 되도록 신앙을 잘 키워 온 사람은 그 헌금의 언어를 이해하는 종교적 합리성을 스스로 찾게 되었으리라. 이 모두는 인간의 삶에서 말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과정들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런 앎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 안에는 어떤 세계가 있고, 그 세계 안에는 주체의 체험이 빚어내는 의미의 부화가 있었을 것이다. 또 어느 쪽이 되었든, 다른 반대쪽을 확증 편향처럼 무시할 수는 없다. 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 어느 철인의 말을 굳이 갖다 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말을 안다는 것에는 이런 심오한 인식의 내공이 들어 있는 것이다.

 

03

‘하나의 말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언어기호(記號)로서의 말을 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말 배우기가 얼마나 만만한 것이겠는가. 어떤 말을 문자 기호로 적을 수 있고, 문자 기호로 된 말을 읽을 수 있고, 그 뜻을 사전에서 찾아서 알 수 있는 것으로, 말 배우기를 다 했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만만한 과업이겠는가.

 

말을 배우고 이해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다. ‘말을 안다는 것’은 말과 관련된 인간사(人間事) 세상사(世上事)를 안다는 것이다. 인간사 세상사를 한꺼번에 알기가 쉬운 일인가. 한도 끝도 없는 일이다.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배울 수 없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내가 ‘떨어지다’라는 말을 제대로 체득한 것은 내 인생에 몇 번의 낙방(落榜)을 겪고 난 후이다. ‘너희들이 떨어지는 맛을 알아?’ 하는 경지에 들고서야 나는 ‘떨어지다’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말한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나란히 병치시켜 본다. “말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말이 거느린 인간사와 세상사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것이 오기 때문이다.”

 

말 가르치기, 말 수행하기의 중요함을 각성해 본다.

박인기 경인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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