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2019.09.04 10:30:00

출근길, 서울 성공회성당 화단 등 여기저기에 과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과꽃은 국화과 식물로, 원줄기에서 가지가 갈라져 그 끝마다 한 송이씩 꽃이 핀다. 한여름에 꽃이 피기 시작해 초가을까지 볼 수 있다. 꽃 색도 보라색에서 분홍색, 빨간색, 흰색까지 다양하다. 국화과에 속하는 풀들은 대부분 여러해살이풀인데 과꽃은 독특하게 한해살이풀이다.

 

 

누나의 따뜻한 손과 같은 꽃, ‘과꽃’

과꽃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정감이 가는 꽃이다. 어릴 적 고향에서는 과꽃을 맨드라미·봉선화·채송화·백일홍 등과 함께 화단이나 장독대 옆에 심었다. 과꽃을 보면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라는 가사가 나오는 동요 ‘과꽃’이 떠오른다. 2004년 타계한 아동문학가 어효선이 쓴 동시에 곡을 붙인 노래다. 그래서인지 나태주 시인은 “과꽃 속에는 누나의 숨소리가 들어 있다”고 했고, 누구는 과꽃을 “누나의 따뜻한 손과 같은 꽃”이라고 했다.

 

동요 ‘과꽃’ 외에도 과꽃이 나오는 문학작품은 많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최참판댁 입구에도 ‘대문간에 이르기까지 길 양편에는 보랏빛, 흰빛, 그리고 분홍빛의 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양현은 이 과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 섬진강에 던지며 죽은 엄마 기화(봉순이)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16권). 봉순이는 서희가 간도로 떠난 후 실의에서 빠져 아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린 딸 양현을 남기고 섬진강에 몸을 던졌다.

 

과꽃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과부꽃’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다. 이 꽃이 과부를 지켜 주었다는 꽃 이야기가 전해 오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백두산 근처에 추금이라는 과부가 살았는데, 그 집에는 남편이 생전에 정성스럽게 가꾼 과꽃이 가득했다. 그런데 중매쟁이 할멈이 끊임없이 재혼을 설득하자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즈음 남편이 꿈속에 나타나자 과부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과꽃을 소중히 가꾸며 살았다는 이야기다.

 

과꽃은 원래 북한 함경남도에 있는 부전고원과 백두산·만주 일대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자생지가 옛 고구려·발해 영토와 비슷하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은 몇 년 전 쓴 글에서 “과꽃이 고구려와 발해가 기개를 드높이던 우리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자생종 과꽃은 진한 보랏빛이고 홑꽃이라고 한다. 그래서 과꽃의 한자 이름은 벽남국(碧藍菊)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과꽃은 대부분 겹꽃이다. 중국 쪽 백두산 근처에서 자생하는 과꽃을 보았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야생화 사진작가 김정명 씨는 “2015년 8월에도 연변 부근에서 지천으로 피어난 토종 과꽃을 보았다”며 “개량종과 달리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것이 꽃 맛이 뭔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토종 과꽃 씨앗을 받아와 심어 보았는데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라 그런지 잘 자라지 않았다”고 했다.

 

고향으로 되돌아 온 토종꽃, 과꽃·미스김라일락·섬초롱꽃

우리가 흔히 보는 과꽃은 토종 과꽃을 유럽과 일본 등에서 원예종으로 개량한 것이다. 프랑스 신부가 1800년대 초 과꽃을 보고 반해 씨를 유럽에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개량종 과꽃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 다시 고향인 한반도까지 찾아온 것이다. 이처럼 과꽃은 우리나라 원산이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심고 있는 식물 중 하나다. 화단에 흔한 원예종 꽃 중 거의 유일하게 원래 우리 토종인 꽃이기도 하다.

 

우리가 관심을 안 두는 사이 외국에 나간 식물은 과꽃만이 아니다. 라일락 중에서 1m 정도의 수형(樹形)에다 진한 향기를 지녀 조경용으로 인기인 나무가 있다. 미스김라일락인데, 1947년 미군정청 소속의 식물채집가 엘윈 미더(Meader)가 북한산 백운대 부근에서 털개회나무 씨를 채집해 가져가 개량한 품종이다. 그는 1954년 이를 조경수로 내놓을 때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을 따 이름을 지었다. 이 나무는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도 역수입했다. 우리에게 토종 털개회나무가 있는데 미국에서 개량한 미스김라일락을 심는 것이다.

 

구상나무는 한라산·지리산·속리산·덕유산 등 해발 500m 이상 고지대에서 자라는 상록침엽수다. 잎 뒷면이 흰색에 가까워서 멀리서 보면 나무가 은백색으로 보여 아름답다. 학명(Abies koreana)에도 ‘코리아’가 들어 있고, 영문 이름이 ‘Korean fir(한국 전나무)’인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그런데 1900년대 초 이 나무 종자가 해외로 반출된 이후 서양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기후변화 탓에 상당수가 말라 죽으면서 멸종위기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주요 자생지인 한라산과 지리산의 구상나무는 이미 25%가 말라 죽고, 남아있는 나무 상당수도 고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상나무의 고사 원인도 기후변화로 추정하고 있을 뿐 아직 명확하게 나온 것도 없다.

 

울릉도 특산이지만 이제는 서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섬초롱꽃은 연한 자주색 바탕에 짙은 반점이 아름다운 꽃이다. 이 섬초롱꽃도 외국에서 개량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냥 초롱꽃은 기다란 종 모양의 꽃이 유백색인데 섬초롱꽃은 분홍색이며 섬초롱꽃은 꽃잎에 짙은 반점이 가득한 것이 차이점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초롱꽃은 줄기에 털이 많은 반면, 섬초롱꽃은 털이 없어 매끈하다는 점이다.

 

참나리·하늘말나리·털중나리 등 우리 자생 나리들도 서양으로 반출되어 백합을 다양하게 개량하는 데 쓰였다. 우리는 이런 백합 구근(球根)을 많은 돈을 지급하면서 수입하고 있다. 다른 비비추와 달리 꽃대 끝에서 꽃잎이 360도 빙 돌려나는 흑산도비비추도 1980년대 중반 배리 잉거라는 미국인이 흑산도에서 가져가 ‘잉거비비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처럼 수많은 우리 꽃들이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지 화단과 정원에서 피고 지고 있다. 그나마 우리 꽃들이 외국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것일까.

 

이 글을 쓰기 위해 과꽃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보라색·분홍색 혀꽃(설상화)에 노란 중앙부를 가진 꽃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핀 것이 참 예쁘다. ‘꽃 맛’을 느끼게 해 준다는 토종 과꽃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백두산 근처에서 피어나는 토종 과꽃을 빨리 만나보고 싶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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