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물의 결, 사람의 결

2019.12.05 10:30:00

01

B는 나의 오랜 친구이다. 그는 직업 군인으로 일생을 지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인간의 육감(sixth sense)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B는 자기가 옛날에 본의 아니게 멧돼지를 사살했던 일을 회상했다. 다음은 B가 나에게 해 준 이야기이다.

 

야간 특공 훈련하던 때였어. 실전과 다름없는 야간 사격 훈련을 하는 중이었지. 갑자기 야생 멧돼지가 사격장 안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왔어. 나는 사선(射線)에서 사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당황스러웠지. 야생 멧돼지, 잘못 건드리면 아주 사납게 덤벼든다는 걸 알고 있었지. 어둠 속에서도 멧돼지의 움직임은 시야에 들어왔어. 마침 그날 훈련이 ‘야간 이동 표적 사격 훈련’이었어. 그때 사격 통제관이 나에게 명령했어. “3번 사수 B! 전방에 나타난 멧돼지를 사살하라.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사격 개시!”

 

나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생명체를 죽이게 된 거야. 아주 야릇한 느낌, 무겁고 불유쾌한 느낌이었어. 멧돼지가 그냥 알아서 사격훈련장을 벗어나 도망가 주기를 바랐어.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어. 녀석은 우리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통제관이 독촉했어. “B 사수, 뭘 하고 있나?” 나는 녀석을 조준했지. 실패하면 안 되니까 어둠 속에서도 정조준으로 겨냥을 했지. 방아쇠에 오른쪽 둘째손가락을 옮겨 놓고 심호흡을 했어.

 

녀석이 살짝 움직이는 듯했어. 녀석이 주춤하며 다시 내 쪽을 쳐다보는 사이, 나의 손가락에 걸린 방아쇠가 어느 결에 뒤쪽으로 아주 서서히 밀려갔어. 무심결에 밀려졌다고나 할까. 사살 명령을 받긴 했지만, 녀석을 꼭 죽이겠다는 특별히 의도가 내게 확정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거야. 오히려 ‘내게 없는 살의’를 어떻게든 실행해야 하는, 뭐 그런 망설임 쪽이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무심결에 격발이 되었다는 거야.

 

순간 녀석이 주저앉으며 무너지고 있었어. 나 또한 그 순간 아주 기묘한 비현실적인 느낌이 왔어. 그게 뭐냐고? 내 손가락이 닿아 있는 방아쇠, 그 쇠로 된 방아쇠에, 마치 좀 두꺼운 살가죽같이 약간 뭉클하다는 느낌의 미세한 충격이 와 닿는다는 느낌을 받았어. 녀석의 살결을 파고드는 총알이 받는 저항의 파장이 어떤 결이 되어서 내 감각에 와 닿았다고나 할까, 녀석의 숨결이며, 녀석 맥박의 물결 같은 것들을 내 방아쇠가 무심결에도 다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쇠로 된 방아쇠가 뭉클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런데 나는 방아쇠가 살짝 뭉클했음을 분명 느꼈다네. 비록 짐승이지만 녀석의 몸 안에 숨겨진 ‘생명의 결’을 내가 예민하게 감수(感受)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거야. ‘결’을 안다는 것은 신비해. ‘결’을 느낀다는 데에는 어떤 초월적 감응이 작동한다고 봐. 지금 생각해도 그 ‘결’이란 것이 너무 생생하고 신비로워.

 

02

나는 B의 이야기를 듣고, ‘결’이라는 우리말에 대해서 나의 감수성이 무디었음을 각성했다. ‘결’이라는 말이 한국인의 의식과 정서를 매우 섬세하게 나타내는 말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냥 섬세함이 아니라, 한국인다운 감응(感應)과 인지(認知)에 부합되는 섬세함이다. 특히 한국인의 정서적 체험과 무의식을 오묘하게 연결하고, 그것을 표상하는 데에 ‘결’이라는 말이 발휘하는 기능은 신통하다. 멧돼지의 몸 안에 움직이는 ‘생명의 결’을 방아쇠의 뭉클함으로 느꼈다는 B의 말이 이를 웅변으로 증명한다.

 

‘결’은 논리의 범주를 초월하여 한국 사람의 육감(六感)에 호응하는 말이다. 한국 대중 가요사에 봉우리를 이루는 가수 남인수가 1955년에 불러 널리 알려진 노래에 ‘추억의 소야곡’(백영호 작곡, 한산도 작사)이 있다. 가사는 이러하다. 여기에도 ‘결’이 등장한다.

 

바람결에 너의 소식 전해 들으면 /

행복을 비는 마음 애달프구나 /

불러도 대답 없는 흘러간 사랑 /

차라리 잊으리라 / 차라리 잊으리라 /

맹세 슬프다.

 

‘바람결에 전해 듣는 소식’이란 도대체 어떻게 전해 듣는 소식인가. 막연하고 오묘하고 불투명하다. 그러나 이 말뜻을 못 알아듣는 한국 사람은 없다. 당시 학교를 못 다닌 농촌의 아낙들도 알아듣던 말이다. ‘바람결에 듣는 너의 소식’은 바람에 묻어서 정처 없이, 자취 없이, 그 어떤 구체성도 확인할 길 없는 소식이다. 들어도 안 들은 듯한 소식이고, 안 들었어도 들은 듯한 소식이다. 그런 소식은 더 막막하고, 더 희미하고, 더 멀고 아득하다. 이 노래 가사에서 ‘바람결’은 ‘불러도 대답 없는 흘러간 사랑’과 기막히게 호응한다. 또 서두의 ‘바람결’은 끝의 ‘맹세 슬프다’를 이미 예언한다. 이 노래의 애달픈 정조는 ‘바람결’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결’이 지니는 ‘섬세한 의미 번짐’은 한국인이 아니면 그 말의 맛을 누릴 수 없다. 그런 만큼 ‘결’이 드러내는 ‘오묘한 의미 표상’은 외국어로 옮기기가 거의 불가능이다.

 

‘결’은 우리 고유의 말이다. 이 말을 국어사전에서는 몇 개의 항목으로 구분하여 올려놓았다. 사전에서 처음 나오는 ‘결’의 뜻은 이렇게 되어있다. ‘(나무·돌·살갗 따위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하나하나의 층을 이루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라고 풀이되어 있다. 용례를 보면 느낌이 온다. ‘결이 고운 비단’, ‘나무의 결’ 등의 용례를 보면, ‘결’을 알 수 있다.

 

사전에서 두 번째로 나오는 ‘결’은 ‘성품의 곱고 사나움의 상태’를 뜻한다. ‘결이 고운 아가씨’라는 용례가 있다. ‘마음결이 비단결 같다’라는 용례도 여기에 해당한다. 사전에서 세 번째로 나오는 ‘결’은 사이, 때, 짬 등의 뜻이다. ‘어느 결에 그 많은 일을 했느냐?’ 할 때의 ‘결’이 바로 그런 뜻이다. 그러나 ‘결’의 두 번째, 세 번째 뜻도 첫 번째 뜻으로부터 전이되어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물이 안으로 은밀히 품고 있는 대단히 작고 섬세하고 그윽한 자질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라는 데서 공통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은 사전에서 구분하는 의미 범주들을 훨씬 다채롭게 넘나들면서, 딱히 무어라 고정하여 그 뜻매김을 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번져나가곤 한다. 머릿결, 나뭇결, 솜결, 물결, 살결, 흠결, 숨결, 꿈결 등은 눈으로 포착하기 힘든 어떤 질감을 불러온다. 이 말들을 비유적으로 쓰면 느낌의 오묘함과 섬세함은 더욱 그윽해진다. ‘결’은 현상적이면서 동시에 현상을 초월하는 의미를 담아낸다. “무심결에 눈물을 보였다”라고 한다면, 이때의 ‘결’은 ‘무심(無心)’을 비집고 드는 어떤 마법 같은 틈새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엉겁결’도 있다. ‘엉겁(끈끈한 물건이 마구 달라붙은 상태)’에도 ‘결’이 비집고 들어, 의미를 번져나가게 하는 것이다.

 

03

석공은 돌의 결을 안다. 목공은 나무의 결을 안다. 결을 모르고 돌을 다룰 수 없으며, 결을 버리고 나무를 길들일 수 없다. 장작을 패려 해도 나무의 결을 알면 좋다. 숙련된 농부는 비 올 바람의 결을 안다. 물의 결을 아는 어부는 물고기가 모이는 자리를 안다.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 사물의 결을 아는 경지에 가서야 가능하다.

 

사람의 마음에도 결이 있다. 곱다 거칠다를 넘어서는, 그 사람의 사람됨을 형성하는 고유한 결이 있다. 그의 사람됨의 고유한 결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의 진정한 스승이 되고, 진정한 멘토가 될 수 있다. 이는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잠언을 실천하는 길이기도 하다. 현대 교육이 이상으로 삼고 있는 ‘개별화 교육’의 구경(究竟)도 ‘사람 학생’의 마음결을 아는 데에 있다. 사람의 결을 알려면 오랜 사귐이 있어야 한다. 깊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 오랜 사귐과 깊은 만남이 쉽지 않은 세태이다. 사람 기르는 교육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지식을 익힐 때도 지식 안에 숨어 있는 어떤 결을 만나야 할 것이다. 사실적 지식을 암기하는 차원을 넘어, 그 지식에 내재하여 밖으로는 안 보이게 분비되는 지혜의 결을 만나도록 하자. 무릇 모든 배움은 지식의 숨은 결이 감지되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살아난다. 독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래 숙성시켜 가면서 읽는 책이어야 그 책의 진수를 만난다. 무겁고 두터운 독서에 기꺼이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그 책이 지닌 ‘생각의 결’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박인기 경인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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