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자‧피해자로 만났지만 평범한 인민 동지의식 존재”

2019.12.23 15:12:38

⑲일제하 일본인 교원들. 끝

신민화가 조선인 행복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라 생각
제국주의의 하수인이자 평범한 교사의 면보도 보여
회고록 통해 자신의 경험을 성찰적으로 분석하기도
상호 존중을 회복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메시지 남겨

 

 

식민지 시기 교사였던 이만규에 따르면 교직은 가장 불행한 직업이었다. 일본 동화정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특히 공립학교 교원은 일본 제국주의의 하수인 역할을 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5가지 유형의 교사들이 있었다. 첫째는 일본 통치를 견딜 수 없어 스스로 교단을 떠났던 유형, 둘째는 드러내고 비판적 활동을 하다가 교단에서 밀려난 유형이다. 셋째는 교단에 남아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감시의 대상이 된 경우, 넷째는 제국주의 정책에 순응하고 타협했던 부류다. 마지막은 적극적인 부일협력을 했던 유형이다. 이만규는 이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한 것이 4번째 유형인 순응과 타협의 부류라고 말한다.

 

일본인 교원의 진출은 1906년 이후 통감부 시기부터 시작해 식민지시기에 본격화했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부터는 학교 교육에 대한 한국인의 수요가 높아지고 입학난이 심해지는 양상이 전개됐고 1930년대에는 농촌진흥정책과 농촌지역 학교 수요 대응 등의 일환으로 총독부측에서 일본인 교원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식민지 조선에서의 교사 경험을 회고록으로 출간한 3명의 교사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경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3명의 교사는 코스고우 시게아키(越河繁明·평안북도), 이토우 이사무(伊藤勇·전북), 타베이 준지(部井順次·경남) 등이다. 

 

이들 3명의 교사는 공통적으로 일본이 만주 경영을 본격화한 1930년대 중반 이후 국내에 왔고, 모두 일본 농촌 출신으로 일본 중등학교(중학교, 농업학교)를 거쳐 국내 사범학교에서 1년간의 사범과 교육을 받고 농촌지역 공립초에 발령을 받았다는 특징이 있고 패전과 함께 본국으로 소환됐다. 패전 이후 다시 일본 내 출신지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자서전 겸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들은 1930년대 공황 등으로 피폐해진 일본 농촌에서 농업학교 등을 다닌 후 식민지 경영에 대한 본국 정부의 선전으로 나름의 애국심에 고무돼 한국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농업학교 졸업생들은 국내 사범학교에서 단 1년간의 과정을 수료하면 교사자격증과 함께 지역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이토우 이사무에 의하면 1935년 전후에 평양, 경성, 대구 등의 사범학교에 일본 ‘내지’ 농학교 졸업생들을 대량으로 입학시킨 것은 조선총독부가 농촌진흥정책과 조선인 황민화추진을 위한 교원부족을 보충하려는 ‘일석이조’의 고육책이었다.

 

그에 의하면 일본에서도 불황이었지만 조선농민의 생활은 ‘인간의 한계’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가혹한 소작료와 빈곤에 의한 비위생, 절망과 무기력의 악순환에 따른 농촌의 피폐는 극에 달했다. 이토우는 마을 사람들이 ‘소박한 반면 민족의식이 강렬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한일합방으로 과거에는 양반의 압제에 시달리던 조선 농민이 ‘이민족 양반’에 의한 억압을 받게 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들 교사들은 사범학교에서 매우 강한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았다. 평안북도에서 활동한 코스고우는 사범학교에서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제국정신을 수없이 강조받았다고 말한다. 황민화정책에 따르면 조선인도 천황의 적자이기 때문에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고, 조선인들이 일본인과 같은 지위를 갖기 위해서는 언어와 문화가 일본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배웠다는 것이다. 그는 신민화 혹은 일본인화가 일본제국발전의 기초이기도 하고 조선인의 행복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이런 이유로 일본인 교사들은 학생들의 창씨개명 독려에도 적극적이었다. 1940년부터 학교는 창씨개명운동을 실시하는 최전선 기지로 간주됐다. 코스고우에 의하면 이 취지는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조선인도 일본인의 일원이 돼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종래의 조선 이름으로는 중국인과 혼동이 일어나서 현지 주민의 존경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일본식 성씨를 갖도록 권고하며 가족을 설득하게 하는 등 창씨개명 상황을 점검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김이 금촌(가네무라)이 되고, 이가 산본(야마모토)가 되는 식의 일본식 이름이 탄생하게 됐다. 창씨개명을 한 학생을 칭찬하고 아직 하지 않은 학생을 질타하기도 했다. 창씨개명은 ‘부모의 일’이고 아동에게는 책임이 없는데도 당시 교사들이 이런 아동들을 생각할 여유를 갖지 않았다고 돌아보기도 한다.

 

이들은 회고록에서 학생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과 다양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타베이 준지는 처음 부임한 학교에서 학생들의 키가 모두 제각기였던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알고 보니 학교 부족으로 초등학교에도 입학난이 심해서 ‘재수생’이 많아지다보니 동학년 내에서도 나이 차이가 심했던 것이다. 심지어 농촌지역의 조혼 풍습으로 결혼해 자녀가 있는 초등학생들도 있었다.

 

이토오 이사무도 처음 부임한 학교에 학생수가 75명(4학년)이어서 ‘지금은 졸도했을 것’이라고 기억한다. 부임 초기 복도에서 키 큰 학생 하나가 조선어로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하는 소릴 들었는데 그것이 욕이었고 나중에 보니 그 학생은 6학년 학생이지만 이토우 교사와 동갑이었다. 이토우는 조선어를 배우지는 못했지만 욕은 알아듣게 됐고 그 안에는 ‘왜놈’이나 ‘시x’ 등 역사문화적 어원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학생들과 겪은 일상의 이야기들을 세세하게 회고하기도 한다. 코스고우는 초임지에서 겪었던 인상적인 일이라며 한 일화를 길게 회고하는데, 초임교사로서의 어리석은 권위와 이를 슬기롭게 해결해준 조선인 학생에 대한 고마움과 관련된 것이다. 어느 날 교실 유리창을 누군가가 깬 사건이 발생해 범인 잡느라 학생들을 남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늦은 시간까지 학생들을 귀가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는데, 문득 창밖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권위 때문에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급장이었던 학생이 자신이 유리창을 깼다고 거짓 실토를 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거짓 실토였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귀가를 시켜야 하지만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교사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학생의 기지 덕에 서둘러 학생들을 귀가시킬 수 있었다. 

 

그는 학생에게 평생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있지만 당시에는 표현하지 못했다. 수십 년(회고록 쓴 시점에서는 55년)의 교직 생활을 한 후에도 하루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고 가장 보고 싶은 학생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일본과 북한 간에 수교가 이뤄지지 않아 연락도 해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고 기술한다.

 

코스고우는 ‘동화’가 과연 얼마나 가능할까를 생각하기도 했다. 특히 1941년 4월 조선에도 국민학교 제도가 도입되고 교과서도 일본과 완전히 동일한 것을 사용하게 됐는데, 그때 1학년 교과서에 있던 ‘개나리꽃이 피었다’는 문구가 ‘사쿠라가 피었다’고 바뀐 후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회상한다. 그가 근무한 옥천소학교 주변에는 사쿠라나무가 없었고 대도시 일부에나 심어져 있을 뿐이었다. 알지도 못하고 본적도 없는 사쿠라라는 문자를 맹목적으로 암송할 뿐인 ‘국어교육(황민화차원의 일어교육)’이 과연 ‘어디까지 아이들에게 침투됐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렇게 이들 교사들은 본인들도 일본 농촌의 피폐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국에 온 후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정책을 실행했던 하수인이자 기능인들이었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젊은 청년교사로서 20대 초반의 열정을 한국학생과 함께 나눈 평범한 교사의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이들은 패전 후 본국에 돌아가서 교직을 계속했고, 퇴임한 후에는 회고록을 작성하게 된다. 패전 후 일본의 교육계는 전쟁동원에 협력하고 제자를 전장에 내보낸 당사자들이라는 자괴감을 공유하고 군국주의에 대해 ‘반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과거에 대한 무거운 침묵과 망각의 시기를 거쳐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패전 이전의 시기에 대한 회고가 조심스럽게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재조선 일본인 교사들 중에도 재조선 일본인 학교에만 근무한 경우도 있고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강하게 가진 사례들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들 3명 교사들의 경험이 일반화될 수는 없다. 이 3명의 교사를 여기서 다루는 것은 이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고 그 의미를 성찰적으로 분석하고 있어 일제시대라는 ‘근원적 억압’의 시기를 입체적으로 되돌아 보는데 시사점을 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1980~90년대에 저술한 회고록에서 자신들이 식민주의에 동참했던 것을 무겁게 되돌아본다.

 

코스고우는 자신이 결과적으로 일본제국의 주구에 불과했고 한국인의 큰 적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청춘을 바쳤던 그 시간들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자문한다. 이토우도 스스로 일본 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 결국 억압자였다고 회고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 한편으로 무겁고 한편으로 텅 비는 것 같다고 말한다. 타베이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의도하지 않게 식민지 지배와 동화에 바쳤고 그 시간은 무의미했지만 자신의 내부에 투쟁하는 복잡한 감정들이 교훈으로 남는다고 돌아본다.

 

이들 교사들에게 식민지에서의 교원생활은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코스고우는 4000년의 역사를 가진 한 민족이 일본에 의해 지배되고 일본어만을 쓰도록 강요받았던 것을 안타깝게 돌아보면서 미래에는 부디 긍정적 연계가 있기를 바란다고 기술한다. 이토우는 일본인과 한국인은 비록 침략자와 피해자로 만났지만, 농촌의 평범한 인민이라는 동지의식 속에서 언젠가는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대한다.

 

타베이는 자신의 내부에 남아있는 ‘갈등, 감동, 교류, 고통’의 복잡한 마음이 일본의 전쟁체험을 잊지 않도록 하는데 기여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회고록을 남긴다고 말한다. 이렇게 수십년이 지난 상황에서 이들은 반성과 치유를 통해 상호 존중을 회복하고, 서민적 연대에서 동지의식을 찾으며 전쟁의 상흔에 대한 기억상실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윤미 홍익대 교육학과 교수    

이윤미 홍익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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