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조선 왕릉 답사는 조금 독특하다. 느긋함과 긴장감이 번갈아들기 때문이다. 왕릉은 숲이 있고 왕릉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능침공간이며 제향 공간이 자연의 모습과 잘 어울려 구성하고 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가치인 오랜 전통 속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과 별개로 공간 구성이 아름다워 ‘신의 정원’으로 부르기도 한다. 왕릉 답사는 다른 역사 유적과 달리 천천히 걸으며 즐길 수 있으니 느긋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긴장감이 생기는 이유는 무덤의 주인공, 곧 왕과 왕비에 대해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한 인물, 그것도 왕이나 왕비였던 이의 일생을 논하기 좋은 곳이 무덤이긴 한데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더해 어떤 공간에 이야깃거리가 생기면 조금 더 흥미가 당기는 경우도 있다. 바로 서오릉이 그렇다.
서오릉은 한양 서쪽, 고양의 다섯 개의 왕릉이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고양의 서삼릉이며 구리의 동구릉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이름이 생겼다. 한 구역에 다섯 개의 왕릉이니 특정한 이야기를 상정하기에 어려움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 다섯 왕릉이 예종과 안순왕후의 창릉,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의 경릉, 영조비 정성왕후의 홍릉, 숙종비 인경왕후의 익릉,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명릉이다. 여기에 왕릉은 아니지만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순창원,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수경원, 그리고 희빈장씨의 대빈묘가 있다. 서오릉의 현황을 모두 살펴보면 눈에 딱 들어오는 것이 있다. 바로 숙종과 그의 왕비들이다.
인현왕후와 희빈장씨의 고통스런 삶
명릉을 중심으로 익릉, 대빈묘를 연결하면 숙종과 함께 인경왕후, 인현왕후, 희빈장씨, 인원왕후를 살필 수 있다. 14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46년간 재위한 숙종은 조선 후기에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임금으로 꼽힌다. 숙종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집권 붕당을 일시적으로 갈아치우는 ‘환국’이다. 경신년, 기사년, 갑술년에 펼쳐진 환국의 국면에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는데 여기에는 왕의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이 환국 과정에서 왕비가 바뀌는 일이 있었으니 희빈장씨가 왕비에 오르며 인현왕후가 쫓겨났다가, 다시 인현왕후가 왕비가 되며 희빈장씨가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조선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이 현상을 붕당정치, 또는 환국정치의 폐해로 보기도 하지만 당사자였던 인현왕후나 희빈장씨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며 결국 희빈장씨는 자진의 명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인현왕후의 고통 역시 희빈장씨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컸으리라. 그런 점에서 정치 국면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서 인현왕후나 희빈장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런 공간이 바로 서오릉이다.
서오릉에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왕릉이 명릉이다.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가 묻혀있다. 그런데 능침공간의 무덤 배치가 조금 독특하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하나의 영역에 있는데, 인원왕후는 조금 떨어진 공간에 묻혀있다. 조선 왕릉이 왕과 왕비가 같이 묻혀있는 것도 일반적이며, 왕이나 왕비가 혼자 묻혀있는 경우도 일반적이지만 이런 사례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1701년, 35살의 아까운 나이로 인현왕후가 숨을 거두었다. 그보다 안타까운 것은 죽기 전 1년 반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 치면 다리에 염증이 생긴 것인데 면역질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것이 온몸을 망가뜨렸는데 그 고통이 대단했다. 그런데 이런 면역질환은 보통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점에서 현대의 병으로 취급되곤 한다. 하지만 왕실, 그것도 왕자를 생산하지 못했으며 한 번 쫓겨나고, 또 복위되는 과정을 거친 인현왕후라면 현대적 의미의 스트레스가 격심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기록으로 추측하는 것이지만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인현왕후의 삶은 이러한 말년의 병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을 마감한 인현왕후를 위해 숙종은 명릉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옆에 묻힐 공간을 마련했다. 네 명의 왕비(희빈장씨를 포함할 경우) 가운데 인현왕후를 제일 마음에 두었을까. 그리고 1720년, 숙종도 여기에 묻혔다. 이렇게 명릉의 모습이 정리될 것 같았다. 실제로 숙종은 살아있던 시절 다른 왕비(아마도 인원왕후)의 상이 나면 묻힐 공간으로 익릉과 명릉 사이 언덕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이란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757년 2월, 영조의 비였던 정성왕후가 죽었다. 영조는 숙종의 사례를 따라 정성왕후의 무덤을 만들며 자신이 묻힐 공간을 마련했다. 이렇게 되자 규모나 중요함에 있어 정성왕후 혼자 묻히는 왕릉과 달라졌으며 많은 경비와 인력이 투여됐다. 그런데 다음 달, 인원왕후의 상이 난 것이다. 동시에 두 개의 왕릉을 조영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던 영조는 인원왕후의 무덤을 기존 명릉 옆에 붙여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인원왕후의 무덤이 추가되며 명릉의 주인공은 세 명이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영조는 정성왕후의 무덤, 곧 서오릉 안에 있는 홍릉이 아닌 동구릉의 원릉에 묻혔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죽어서 묻히는 자리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결국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는 같은 공간에 묻히게 됐다. 숙종이야 사양할 일은 아니지만 인현왕후나 인원왕후로서는 조금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선입견이겠지만 피하기 어렵다.
역사 속 인물의 삶 살펴보는 기회
명릉을 지나 조금 더 경내로 들어가면 익릉이 있다. 익릉의 주인공은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다. 인현왕후, 희빈장씨에 가려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시 비극의 주인공이다. 10살에 입궁해 19살,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안타깝다. 두 아이(공주)를 낳았지만 금방 여의고 자신은 천연두에 걸려 죽음에 이르렀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감정은 배가 된다. 더구나 인경왕후가 걸렸던 병이 천연두였으니 왕은 문병조차 올 수 없었다. 창덕궁에 머문 왕을 걱정하며 경희궁에서 혼자 병마와 사투를 벌이다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왕릉 답사는 단순한 역사 공부를 넘어 옛사람의 삶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아가는 동안 역사 속 인물에 대한 공감에 이르게 된다.
이제, 마지막 공간이다. 바로 희빈장씨의 무덤, 대빈묘다. 대빈묘는 1970년대 광주에서 이장해 왔으니 처음부터 서오릉 경내에 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희빈장씨의 무덤 역시 서오릉 경내로 옮겨왔으니 숙종으로서는 네 명의 왕비를 모두 지척에 둔 셈이 됐다. 대빈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왕릉(왕릉은 왕비의 무덤을 포함한다)의 격과 다르다. 금방 보아도 일반 사대부의 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 희빈장씨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희빈장씨는 왕비에 올랐고 아들이 왕이 됐지만 광산김씨의 인경왕후, 여흥민씨의 인현왕후, 경주김씨의 인경왕후처럼 명문가의 사람이 아니다. 숙부인 장현이 역관이었다고 하니 중인 집안이었을 것이다. 또 궁녀로 들어가 왕비가 됐으니 그 격차는 더욱 컸다. 그러니 경종의 생모이긴 하지만 희빈장씨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희빈장씨를 종종 장녀(張女)로 칭하곤 했다. 장씨 성을 가진 여성이란 뜻이다. 심지어 큰 수해가 났는데 그것도 희빈장씨의 탓으로 돌린 기록이 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지하게 대신의 발언을 적은 것이다.
그러니 왕비였고 희빈이었던 시절, 희빈장씨를 향한 궁궐 안팎의 시선이 어떠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 희빈장씨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 곧 죽기 전 격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이나, 세자에게 해코지를 했다는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희빈장씨의 장례를 치를 때 세자가 참여토록 했으니 그러한 정황이 있었을 거라는 건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가문의 무게를 진 다른 왕비와 달리, 가문의 배경을 등에 업은 다른 왕비와 달리 행동해야 했던 희빈장씨는 눈에 거슬렸던 것 같다. 그래서 대빈묘 앞에 서서 무덤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하지 않다.
서오릉 답사는 흥미롭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평소 관심을 갖지 못했던 왕비들의 삶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를 보는 시선이 풍부해지고 다양해진다는 것은 조금 더 당시 진실에 가깝게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업적이며 연표로 기억되던 인물이 눈앞에 등장하는 것은 특별한 역사 경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