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모토로 나름 살려고 노력해왔다.
침소봉대하지나 않을까 염려도 되고, 모토와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도 들지만, 34년의 짧지 않은 교단에서 겪었던 많은 경험들 중에서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또렷이 자리하고 있는 몇 가지 경험들을 정리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스스로 위로하면서, 간단하고 진솔하게 나만의 보물들을 열어 보고자 한다.
하나! 늦게까지 함께한 작지만 소중한 첫 보물들
86년 3월! 꿈에 그리던 교직 첫걸음을 충남 보령의 작은 시골 중학교로 2시간마다 버스가 운행되는 외딴곳에 위치한 학교였다.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을 확인하여 통과하지 못하면 7시 30분 마지막 버스 시간에 맞춰 남겨서 지도하여 월례고사에서 압도적 성적을 거뒀던 70여 일의 짧지만 강렬하게 아직도 아이들 얼굴과 이름이 기억되는 첫 학교였다.
군 복무 후 역시 면 소재지에서 걸어서 30여 분 걸리는 서산의 작은 시골 중학교에 복직해 처음으로 온전한 1학년 담임을 맡았다. 다른 아이들보다 2살 더 많은 소년가장 아이, 중간중간 감정을 폭발시키며 수업 공개의 날까지도 감정통제가 안 되어 어렵게 했던 암기력은 천재와도 견줄만한 아이,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친한 친구였던 성격 좋고, 리더십도 있고 공부도 운동도 좋아했던 반장 아이-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도 고향에서 일반직공무원으로 듬직하게 고향을 지키며 친구들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거의 매일 방과 후에 아이들과 함께 어둑해질 때까지, 시골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축구를 하면서 평소 보이지 않던 아이들 특성 파악 및 유대관계에도 아주 좋았고, 한편으로는 체력단련도 하여 그해 체육대회에서 구기 종목과 줄다리기는 물론, 1학년 학생들이 5km 단축마라톤에서도 2, 3학년 형, 누나들을 제치고, 1등부터 5등까지 모두 우리 반 아이들이 들어와 1, 2, 3학년 전체 12개 반 중에서 1학년 학급 아이들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 종합우승을 했던 순간과 그때 우리 반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둘! 전교조 해직사태의 어려움, 잊지 못할 추억, 특히 고등학교 입학금 대납
처음으로 중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아 8:30까지 야간자습을 지도했던 1989년! 다사다난했던 한 해로 중간에 전교조 해직사태가 발생하여 시골 작은 학교였지만 두 분이나 해직되셨고, 특히, 아이들 1, 2학년 때 담임이셨던 선생님도 해직되셔서, 어린 나이에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지만 너무나도 크게 곤혹스럽던 상황에서도, 나를 따르는 아이들도 많았기에, 함께 담담하게 잘 견뎌낸 아이들이 자랑스럽다.
부모님과 마찰로 가출하여 밤늦게 자전거 타고 저수지 주변을 찾게 했던 4명의 아이들, 지금은 40 중반의 아줌마가 되었지만 간간이 연락하는 6명의 아이들, 2번보다 머리 하나 크기 작은 아주 왜소하여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던 1번 아이, 매일 아침이면 등굣길에 꺾어온 꽃을 정성스럽게 꽃병에 담아 놓았던 아이들, 시험점수 100점 맞은 과목만 용돈 3천 원을 받아 공부에 욕심이 많을 수밖에 없던 아이, 꾀병으로 결석이 잦아 자전거 타고 가정 방문하며 데려온 아이, 말수가 적고 친구와 잘 어울리지 못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지도했던 아이들.
특히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머님 친정 마을로 강원도에서 전학 왔다 졸업 몇 달 전에 어머님마저 돌아가셔서 졸지에 고아가 된 하얀 얼굴의 아이-공부는 상위권이었지만, 가정형편으로 인근 면 소재지 고등학교에 진학 예정이었는데, 고등학교 입학등록금을 못 내 어려워 쩔쩔매던 학생의 입학등록금을 담임으로서 대신 납부해준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한 일이었다. 나중에 이 아이가 고등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까지 진학했다고 얘기를 들었다. 그 당시에 면 소재지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진학은 가뭄에 콩 나듯 하던 때였다.
셋! 결혼과 통근, 교통사고 예방 및 학년 학습환경 조성 추억들
1990년 1월 결혼하여 집사람이 근무하던 태안지역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그때만 해도 태안 근처 서산에도 큰 병원이 없어 복수가 차서 임신기간 내내 고생했고, 출산 한 달여 남기고 대도시 큰 병원에 빨리 가보라는 시골병원 의사 선생님의 충고로 고향인 대전 소재 유명한 산부인과에 갔었고, 나는 다시 근무하러 버스로 서산에 돌아왔는데, 그날 저녁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대학병원에 급히 갔는데, 집사람과 첫아이 모두 죽을지도 모르니 빨리 수술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고, 며느리가 걱정되어 일찍 퇴근하시던 아버지가 대신 사인한 후 제왕절개 수술로 2.25kg으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10여 일 더 있었던 아찔한 기억이 있다.
그런 경험으로 어쩔 수 없이 그래도 충남에서 큰 병원이 있는 천안 소재 여학교에서 3년간 근무하며 둘째 아이까지 출산하였다. 육아와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천안에서 집을 얻을 형편이 못 되어, 대전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면서 새벽밥 먹고 대전을 출발 7시 30분경 도착하여 3학년 10개 반 전체 학습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했고, 또한 작년에도 학생 교통사고가 있었던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주 1회 이상 교통지도를 하여 사고를 예방에 힘썼다. 아침 일찍 출발 매일 왕복 170km를 통근하느라 힘들었지만 그래도 태안으로 발령받고 떠나올 때 너무나도 슬퍼했던 아이들 모습이 떠올라 너무 가슴이 메어온다.
넷! 가슴 시리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너무도 소중한 97년 어느 봄, 여름날 이야기
어쩔 수 없었던 3년의 천안 생활 후 다시 태안 면 소재지 중학교로 돌아와 1학년 때부터 담임했던 아이들과 2학년, 3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다.
97년 어느 봄날! 평소 육상선수로 학교를 대표해서 출전했던 누구보다도 건강하다고만 여겨졌던 여학생이었는데 단지 감기 걸렸다고 생각하고 병원에 갔다가, 큰 병원에 가보라 하여 천안 단국대 병원에 가서 검사 결과, 급성 골수 구성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무균실에 입원한 친구를 위해 작은 일이지만 무언가 친구의 생명을 살리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우선 45명의 아이들 모두가 매일 동전 모으기를 해보자고 하였다.
시골 아이들이었지만 매일같이 1달간 동전만 모은 돈이 102만여 원이었다. 여기에 교직원의 성금도 더해져 150여만 원을 모았다. 또한, 모은 돈 전달할 때 몸은 따로 있어도 마음만은 함께 한다는 격려의 메시지를 무균실에서 홀로 사투하고 있던 친구를 위해 함께 전달하자는 아이들의 의견으로 아이들 모두의 격려 메시지를 녹음하여, 반대표 아이들과 함께 병원에 가서 부모님께 전달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지역신문에 실려 교육청과 교회들, 사회 각처에서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보내주셔서 3천여만 원의 큰돈이 모아져 부모님께 입금해 드렸다. 무엇보다도 백혈병 걸린 아이가 필요로 했던 것이 혈액이었는데, 정말로 감사하게도 인근 군부대장님의 적극적인 협조로 매주 장병들이 아낌없이 헌혈에 동참해주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그해 여름 아이 집을 방문하여 아이가 기적같이 살아났고, 다음 해에 학교에 복학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러한 가슴 시리지만 기적 같은 일을 겪고 난 후, 도움받은 것을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이들과 함께 주변의 이웃을 돌아보고, 돕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결심하게 되었고, 작지만 의미 있는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다섯! 작지만 소중하게 이어져온 함께 만들어가는 봉사활동
97년 이후 아이들과 학년을 시작할 때는 97년의 기적을 이야기했고, 작지만 소중한 효와 이웃사랑을 실천-먼저 아이들이 자신의 소중함을 바로 알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일손도 도와드리며, 부모님과 이웃 어른들께 인사 잘하기 등- 쉽지만 기본적인 것들을 실천을 통한 생활화와 아울러 교육공동체와 학생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사랑과 배려의 경험을 실천해오고 있다.
1998년 태안 면 소재지 중학교에서 노아의 집 봉사활동 및 학생들이 편지 봉투에 담아온 쌀을 모아 1자루 이상 전달하였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근무했던 중학교에서도 봉사활동을 하였고, 너무 형편이 어려웠던 새 이름교회에 모아진 쌀과 사랑의 모금 10여만 원을 전달하였다.
안에서 공주로 발령받은 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학교 소재지에 있던 믿음의 집 매달 봉사활동과 아울러 쌀 및 사랑의 모금 수십여만 원을 전달하였다. 또한, 방송국 및 강릉보육원에도 학생들이 성금 한 수십만 원의 성금을 전달하였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전국적으로 봉사활동으로 인지도가 높은 시내 학교에서 근무하며, 매주 토요일 관내 요양 시설들을 돌아가면 리코더 합주 및 어르신들 발 씻겨주기 봉사활동 등으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을 도와가며 최대한 동참하려 노력하였고, 또한 2009년부터 현재까지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한 기관에 적은 돈이지만 매월 7만 원씩 후원을 해오는 중이다.
공주에서 보령으로 발령받은 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년 4회 이상 보령원을 방문하여 어르신들 발 씻겨드리기, 책 읽어드리기 등 봉사활동을 하였고, 학부모님 차량 지원으로 해수욕장 근처 애육원을 방문하여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성금도 전달하였으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조손가정 아이들을 중심으로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여 더 어려운 형편의 장애우들과 함께 귀중한 시간을 보내며 자존감을 높이는 봉사활동도 하였다.
보령에서 논산으로 발령받은 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라파엘 요양원에서 어르신들 발 씻겨드리기 등 봉사활동과 라면 5상자와 초코파이 등을 전달하는 위문 활동도 했고, 학교 인근 경로당 2곳에도 학생회 학생들과 모은 쌀과 라면 2상자 전달 등 위문 활동을 하였다.
2017년 9월 교감으로 발령받은 후,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보이지 않게 도와주고 평소 먹고 싶어 하던 음식도 사주었으며, 주말을 이용하여 아이들과 함께 고구마 캐기 등 지역사회 일손 봉사를 하였고, 또한 성모의 마을에서 악기연주, 장애우 점심 식사 도와주기 및 휠체어 태우고 산책도 하였으며, 아이들과 학교 인근의 목욕하기도 어려운 장애우들이 있는 곳에서 목욕 봉사도 가끔 했으며, 작년 11월 마을과 함께하는 축제 및 돈암서원에서 열린 향시에서 동아리 봉사활동을 지원하였고, 올해는 매월 고운 손 봉사단이 고향의 집에서 어르신들 말벗 및 책 읽기 봉사활동을 지원 및 동참하였고, 8월 강경 야행 이틀간 늦게까지 동아리 봉사활동 지원 및 아이들과 함께 늦게까지 참여하기도 하였다.
서툴고 어눌하지만 나름 아이들과 함께 작지만 소중한 34년의 교직 생활의 보물들을 꺼내 보는 기회를 갖게 된 점이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겸손치 못함에 부끄럽기도 하지만,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나태주의 「풀꽃」 일부를 읽어가며, 나 자신과 다시금 약속하는 시간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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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교단수기 공모 - 동상 수상 소감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들...
1월 6일! 교단 수기 입상자 발표한 날로 저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 되었습니다. 수상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동상이란 너무도 큰 상을 받고 제 마음은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인 양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습니다. 당시 어려웠던 상황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처럼 느껴졌고, 감사 또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작년 11월 25일! 아내가 허리 수술을 한 날입니다. 10년 이상 심각한 허리통증으로 걷는 것도 힘들어했고, 언제부터인가 발가락 마비 증세까지 와서, 더 이상은 수술을 미룰 수 없었습니다.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며 간절했던 그 마음, 2주간 보조기구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연습했던 회복 기간은 긴 터널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깜깜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34년간 교직생활을 한 해 한 해 되돌아보면서 아이들과 함께 꿈을 찾으려 노력한 시간 속에서 의미 있었던 보물들을 나름 찾아볼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남은 교직생활도 감사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다양한 개성으로 성장해가는 보물을 찾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제자들과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